섶다리 ㅡ 안정선 시인
안정선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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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다리
시인 안정선
죽은 등걸 모아 기둥 세우고
나뭇가지 가로 엮어 만든 다리
한여름 폭우 계곡물 밀어닥치면
응당 떠내려가지 싶다
해마다 이별할 줄 아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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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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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선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잇는 시를 통해 세상의 무상함과 삶의 유한함을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작가다. 그의 시는 자연에서 얻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우리 삶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형상화하며, 이 과정에서 죽음과 소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시인의 삶은 자연과 닮아, 시간의 흐름을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철학을 내포한다. 특히 시집마다 등장하는 다리나 강의 이미지는 경계와 이동의 상징으로, 그가 경험한 이별과 새로운 만남의 연속을 시사한다.
이번 작품 '섶다리'에서도, 시인은 일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다리를 통해 인생의 유한성과 순환의 미학을 표현한다.
"죽은 등걸 모아 기둥 세우고 / 나뭇가지 가로 엮어 만든 다리"
첫 행은 ‘죽은 등걸’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다리를 만드는 장면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여기서 ‘죽은 등걸’은 자연의 끝자락, 즉 죽음이나 소멸의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죽음을 무가치하게 묘사하지 않고, 새로운 구조물의 기둥으로 세운다. 이는 소멸된 것들이 또 다른 존재의 기반이 된다는 순환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덧붙여 나뭇가지를 엮는 과정은 삶의 경험들이 모여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드는 것을 비유한다. 다리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인생의 고비마다 놓인 일시적인 길임을 암시한다.
"한여름 폭우 계곡물 밀어닥치면 / 응당 떠내려가지 싶다"
여기서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다리가 떠내려가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부분에서 '한여름 폭우'는 삶 속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고난이나 변화의 상징으로 읽힌다. 시인은 다리가 떠내려가는 것을 두려움이나 저항 없이 ‘응당’ 받아들인다. 이는 고난의 필연성과 소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긍정하는 태도다. ‘밀어닥치면’이라는 표현은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변화를 상기시키며, 시인이 변화 앞에서 취하는 담담한 자세를 보여준다.
"해마다 이별할 줄 아는 다리"
마지막 구절은 섶다리가 매년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 다리는 일시적인 관계와 이별을 받아들이는 상징이다. ‘이별할 줄 아는 다리’라는 표현은 이별과 소멸을 미리 예감하며 그 순간에 대비하는 지혜를 드러낸다.
이는 인연과 만남의 유한함을 인정하며,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다리가 해마다 사라지는 모습은 우리 삶의 순환적 구조를 은유하며, 이별 또한 삶의 일부로 포용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 시는 섶다리라는 단순한 이미지 속에 무거운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인은 폭우와 이별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소멸과 생성의 반복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섶다리는 영구적이지 않음에도 그것이 존재하는 동안의 가치는 빛난다.
이는 시인이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덧없는 것들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응당 떠내려가지 싶다’라는 구절에서 느껴지는 담담함은 감정의 절제된 표현이면서도,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안정선 시인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삶과 죽음을 동일한 흐름의 일부로 인식한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경험할 이별과 무너짐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철학을 제시한다.
이 시는 그가 단순한 감정의 발산을 넘어서, 이별을 하나의 일상적 사건으로 격하하면서도 그 속에서 삶의 미학을 발견하는 시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다리라는 구조물은 물리적으로는 단순한 이동 수단일지 모르나, 시인의 시선에서는 삶의 경계를 잇는 상징적 공간이다. 이 다리를 통해 독자는 매 순간 인생의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고, 그것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더라도 그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깨닫게 된다.
'섶다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유한한 존재의 가치를 깊이 탐구한 시다. 시인은 섶다리의 일시적인 특성을 통해 삶의 본질적 진리를 描破하며, 매년 새로 놓이고 사라지는 다리의 운명을 통해 무상한 삶을 직시한다.
시인의 태도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외려 그는 소멸과 이별을 긍정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만남과 순간의 가치를 찾아내려 한다. 이 시는 단순한 자연의 묘사를 넘어, 인생의 본질을 투영하며 독자에게도 매 순간을 살아가는 의미를 상기시킨다.
표현의 절제와 여백을 통해 시인은 말하지 않는 부분마저도 독자가 느끼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섬세한 언어와 철학적 시각은 독자에게 긴 여운을 남기며, 안정선 시인만의 독창적 시 세계를 보여준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