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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의 풍경

청람 김왕식






툇마루의 풍경



청람 김왕식




늦가을의 오후, 툇마루 끝에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다. 바람은 사뭇 서늘해졌지만, 그들 곁에는 따스한 차 한 잔이 놓여 있다. 주름진 손이 찻잔을 감싸 쥔 모습은 오랜 세월을 담은 풍경처럼 고요하다.

눈앞엔 석양이 천천히 들녘을 물들이고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하늘 아래, 바람은 얕게 숨을 고르며 지나간다. 이들은 바람소리와 함께 떠올랐을 수많은 기억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는다. 오랜 침묵 속에서 서로가 이미 이해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손등 위에 겹쳐진 또 다른 손이 보인다. 할머니가 조용히 그의 손을 덮고 있다. 그 손은 거칠고 주름져 있지만, 마치 그 시간마저 사랑해 온 것처럼 따뜻하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할아버지가 문득 말한다.
“이제는 바람도 우리를 비켜가진 않는구먼.”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웃는다. 그 웃음은 긴 세월을 넘어, 아무리 먼 곳에서도 서로를 찾아내던 기억과 다르지 않다.

석양은 산 너머로 기울고, 멀리 들판의 마지막 단풍잎이 떨어진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할머니의 눈동자에, 그들만의 단풍이 물들어 있다. 말없이 나누는 찻잔의 온기 속에 두 마음은 여전히 잔잔한 봄을 피우고 있다.

시간은 어느새 늦가을에 머물러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서로를 바라볼 때마다 다시 새순을 틔운다. 바람이 툇마루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 순간, 늦가을은 두 사람의 미소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그림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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