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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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만년필을 고집하십니까?
청람 김왕식
한 원로 소설가는 말한다.
“나는 아직도 만년필로 소설 원고를 쓴다.”
그 한 마디는 오래된 문학적 자부심을 드러내는 듯하다. 시대는 빠르게 디지털화되어 가는데, 그는 여전히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을 써 내려가며 창작의 고통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형성되는 순간의 생생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이 문구가 전해지면 어쩐지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이것이 자존심일까, 아니면 시대를 역행하는 고집일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은 손끝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디지털 시대이다. 책 한 권이 나오기 위해 거치는 과정은 손쉽고 신속해졌다.
수백,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원고를 손으로 쓰는 일은 그 자체로도 큰 부담이다. 그런데 젊은 편집자들이 그 난필을 받아 들고서 고민에 빠지는 모습은 눈앞에 그려진다. 이들이 그 모든 글자를 컴퓨터로 옮겨 타이핑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이중고라는 말도 과하지 않다.
실제로, 그 고통의 일부분은 편집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타자기가 있음에도 여전히 잉크가 잔뜩 묻은 만년필을 고집하는 것, 그 자체는 한편으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용적이지 않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득, 그 소설가의 모습이 한 고집 센 영감으로 비치는 것이 우려된다. 옛날 방식이 불편하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 방식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독자나 출판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라면, 그 가치와 자부심이 퇴색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예술가의 고유 영역과 자존감은 물론 중요하다. 그 자존감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일 때, 그 행위는 자칫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주는 고집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 현대적 편리함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가?
어쩌면 그는 예술적 자아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만년필을 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편집자들이 그 원고를 한 자 한 자 컴퓨터에 옮기는 모습은 참으로 위태로워 보인다. 그들의 시간은 그의 자존심을 위해 희생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작가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일까?
물론, 전통의 가치는 소중하다. 펜촉이 종이에 스치는 그 미묘한 감각, 잉크의 냄새, 그리고 글이 완성될 때 느껴지는 손의 떨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변했고, 그 변화에 발맞춰 가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소설가는 그저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방식이 이제는 고집스럽고,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면, 한 번쯤은 그 자존심을 내려놓고 새로운 도구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결국,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시대적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창작'과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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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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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흘러갈 때마다 제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지만, 그 미소 속에는 아련함도 스며있었습니다. 저 역시 긴 세월을 거치며 만년필과 노트를 벗 삼아 살아왔습니다.
제게 있어 만년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 영혼이 깃든 채, 시간을 기록하는 중요한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작가님의 글에서 전해진 현대적 비판과 풍자가 제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군, 시대가 변했지."
이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요즘 세상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순간적으로 소통하고 창작합니다. 저에게 만년필은 그저 글을 쓰는 방식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펜촉이 종이에 닿을 때의 미세한 촉감, 그 소리,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에 실리는 무게는 제가 살아온 시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 과정이 불편하고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비효율성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집중과 몰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어쩌면 제가 고집스러운 노인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저만의 리듬과 속도를 지키기 위한 선택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저에게 창작의 도구는 제 글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입니다.
“나는 내 만년필을 지킬 것이다,”라고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됩니다. 작가님께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셨다는 점, 그리고 젊은 편집자들이 제 난필로 인해 고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그것이 단순한 불편함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작자가 느끼는 그 모든 과정, 그 안에 불편함도 포함되어야만 진정한 글이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세대의 작가들이 느끼는 소중한 가치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모든 것이 속도와 효율에 맞춰 돌아가는 세상에서, 예술가의 진정한 자아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요? 저에게 만년필은 그 답입니다.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다.”
저는 이렇게 제 생각을 정리하며, 젊은 세대가 더 빠르고 편리한 도구를 선택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제가 살아온 방식을 쉽게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살아온 인생의 기록이자, 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 저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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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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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작가님의 작품을 편집하는 젊은 편집자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은, 작가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원고를 다루며 제가 느낀 감정을 정중하게 전하고자 해서입니다. 우선, 작가님의 작품을 편집하는 일은 저에게 늘 영광입니다. 작가님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하신 문학적 깊이와 통찰력은 제가 일하는 동안 많은 배움과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원고를 손글씨로 받아볼 때마다 저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 만년필로 직접 쓰신 원고는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창작의 과정에서 작가님께 소중한 도구임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원고를 디지털화하고 정리하는 과정은, 특히 저희 같은 젊은 편집자에게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손글씨의 난해함으로 인해 원고를 해독하는 것이 힘들 때도 많으며, 그로 인해 오타나 잘못된 해석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물론, 저 역시 작가님께서 만년필로 글을 쓰시며 느끼는 창작의 고유한 감정을 존중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작가님의 문학적 여정의 한 부분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방식이 작가님의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그 부분을 소홀히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편집 과정에서 이러한 불편함이 쌓이다 보니, 이 점에 대해 작가님께 조금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제안드리고 싶었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완성된 원고를 손글씨로 작성하시되, 이후에는 디지털 파일로 전환해 저희에게 보내주실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쭙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필체로 쓰인 원고는 여전히 보존하시되, 저희 편집 과정에서는 디지털화된 파일을 사용한다면 서로에게 더욱 효율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작업 속도도 빨라지고, 저희가 작가님의 글을 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다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을 드리는 이유는, 작가님의 작품이 조금 더 많은 독자에게 빠르게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저희가 편집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된다면, 그만큼 더 많은 독자들이 작가님의 글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님의 문학적 가치와 창작 과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 제안을 신중하게 고민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