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27. 2024
임보선 시인의 시 '산다는 것이 가을산일지 모른다'
임보선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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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이 가을산일지 모른다
시인 임보선
산다는 것이 깊은 상처를 지닌
찬란한 슬픔의 가을산일지 모른다
작별 없이 떠나간 연분홍 빛 봄 산도 강 풀리면 강마을로 내려가 산그림자 품는다
무성한 짙푸른 숲으로
흉 허물 속살 다 가려주던 여름산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천년의 그 바위에 이끼 머금고 전설같이 얽힌 칡꽃을 피웠다
차마 드러내지 못한 사무친 그리움 속으로 속으로만 물들어
단풍으로 봄부림 친다
가을이면 말없이 온천지를 물들인다
산다는 것이 참고 사는 가을산처럼
소리 없이 물들이는
아름다운 침묵으로 변하는
가을산일지 모른다
산다는 것이 가을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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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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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선 시인은 삶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인으로, 특히 삶의 다양한 측면을 자연의 이미지에 비유하여 진중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인생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섬세한 자연 묘사를 통해 드러내며,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본 시 "산다는 것이 가을산일지 모른다"는 이러한 그의 문학적 경향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인생의 사계절 중 가을에 대한 고유한 통찰을 통해 삶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이 시의 첫 행, “산다는 것이 깊은 상처를 지닌 찬란한 슬픔의 가을산일지 모른다”는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가을산을 통해, 존재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깊은 상처’와 ‘찬란한 슬픔’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겪는 비애와 아름다움을 함축적으로 담아내었다. 이는 고통을 딛고 피어나는 삶의 찬란함을 암시하며,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시인의 철학적 태도가 엿보인다.
“작별 없이 떠나간 연분홍 빛 봄 산도 강 풀리면 강마을로 내려가 산그림자 품는다”라는 구절은 봄의 생명력이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가며, 다른 형태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강 풀리면 강마을로 내려가’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삶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이어짐을 암시하며, 시인은 삶이 단절되는 것이 아닌 순환적 흐름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이어지는 “무성한 짙푸른 숲으로 흉 허물 속살 다 가려주던 여름산”은 인간의 결점과 흉을 가려주던 여름산의 포용성을 드러낸다. ‘흉 허물 속살’을 가려주는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자연의 너그러움과 더불어 인간의 결점 역시 자연 속에서 용인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여름의 여유로운 포용력을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과 관용을 표현한 대목으로, 시인의 깊은 인간애가 드러난다.
“천년의 그 바위에 이끼 머금고 전설같이 얽힌 칡꽃을 피웠다”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자연 속에서 이어져 온 생명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천 년의 시간 동안 머금은 이끼와 칡꽃은 인내와 끈기의 상징으로서, 인생의 험난함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이는 시인이 삶에서 겪는 고난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견디고 나아가야 할 대상임을 의미한다.
“차마 드러내지 못한 사무친 그리움 속으로 속으로만 물들어 단풍으로 봄부림 친다”는 드러내지 못한 감정이 단풍을 통해 색으로 표출되는 모습을 통해,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이는 억누른 감정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단풍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며, 사무치는 그리움이 내면에서 점차 물들어가는 모습을 통해 삶 속의 감정적 갈등을 암시한다.
“가을이면 말없이 온천지를 물들인다”는 가을이 말없이도 온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처럼, 인생 또한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남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는 시인이 가을이라는 계절을 통해 삶의 덧없음과 동시에, 그 안에 숨겨진 은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산다는 것이 참고 사는 가을산처럼 소리 없이 물들이는 아름다운 침묵으로 변하는 가을산일지 모른다”는 가을산의 조용하고도 참을성 있는 존재 방식을 삶에 비유하며, 시인의 철학적 시선이 드러난다. 침묵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통해, 화려하지 않으나 속으로 깊이 물드는 삶의 가치가 전해진다. 이는 세상을 조용히 물들이며 살아가는 가을산의 모습에 대한 긍정적 해석으로, 시인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 존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간다.
이 시는 임보선 시인이 가진 자연과 삶에 대한 고유한 통찰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을산의 아름다움에 비추어 풀어낸 작품이다. 시의 각 행은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함께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며, 가을산의 조용한 물듦처럼 소리 없이 흐르는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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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선 시인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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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인의 시를 읽으며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은 독자입니다. 저는 “산다는 것이 가을산일지 모른다”를 통해 삶의 고요한 아름다움과 인간 존재의 복잡한 감정들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녹아드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가을산의 침묵 속에 담긴 깊은 슬픔과, 찬란한 생명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모두 삶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부분은 "참고 사는 가을산처럼 소리 없이 물들이는 아름다운 침묵"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가을산의 묵묵함을 인생의 여정과 겹쳐보며, 때로는 말 없는 인내가 가장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계절이 변해도 산은 제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속으로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고유한 색과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님의 글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내면이 연결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시인의 섬세한 표현과 깊은 성찰 덕분에, 제 삶 속에서도 조용히 물들어가는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시를 읽고 난 후, 자연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인의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소중한 깨달음을 선사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더욱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가슴 깊은 감동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