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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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와 주전자
막걸리 한 되 받아오라,
빛바랜 연녹색 주전자 들고
햇살 속 신작로를 걷는다.
동구밖 모퉁이 작은 구멍가게,
10원짜리 한 장 손에 쥐고
눈깔사탕 향기에 마음 설렌다.
돌아오는 길,
동네 형과 나란히 걸으며
주전자 속 시원한 막걸리 꿈꾸다
문득 마주한 눈빛에
“한 모금 들이켜볼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벌컥벌컥,
목젖 울리는 형의 소리.
주전자는 가벼워지고
발길은 휘청거리며,
머릿속엔 달콤한 안개가 내려앉는다.
집 앞 개울가에 선 우리는
물이 채운 주전자 속에
작은 비밀을 가득 담는다.
무거워진 주전자는
다시 평온을 가장하고
술상 위로 오른다.
"허 참! 오늘 막걸리는 와 이리 싱거운겨?"
할아버지의 미소 속에
내 마음은 불안과 웃음 사이를 오갔다.
밤하늘 별빛 아래,
거나하게 취한 할아버지와
나는 속삭였다.
달콤한 막걸리와
따뜻한 별빛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나만의 보물이 되었다.
고향에 들를 때마다,
그 형을 찾아 막걸리 한 사발 나누며
말없이 빈 잔에
그 시절의 추억을 가득 담는다.
휘청거리던 발길,
싱거운 막걸리,
그리고 빛바랜 연녹색 주전자.
모두가
별빛 속에 살아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