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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세지감의 풍경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모든 것이 선명했고, 굶주림조차 일상이었다. 배고픔이 우리를 움직였고, 참외와 수박은 그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밤이면 친구들과 몰래 주인집 과수원을 넘고, 과일 몇 개를 품에 안고 도망치던 순간들은 어린 마음에 무언의 모험이었다. 배고픈 시절의 주인들은 우리를 눈감아 주곤 했다. 그들의 묵인 속에서, 우리 손에는 과일이, 마음에는 희열이 채워졌다.
엿장수가 마을을 지날 때면 배고픔 이상의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엿이란 것이 그저 단맛의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이자 꿈이었다. 엿을 손에 넣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부엌을 뒤져 낡은 냄비와 솥뚜껑을 찾아내고, 그마저도 없다면 신던 고무신까지 벗어던졌다. 손에 쥔 엿 한 가락은 그렇게 값비쌌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행복했다. 껌처럼 늘어지는 엿 한 조각 속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런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어느새 세상은 달라졌다. AI라는 것이 등장하며 세상을 재편했다. 기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사람들은 그에 따라 움직였다. 과거의 손때 묻은 정과 인심은 차갑고 계산적인 디지털 세계 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한 그릇의 국수를 먹는 것조차 단순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노인들은 기계화된 계산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곤 한다. "어르신, 여기 터치하세요."라는 말은 그들에게 고된 시험 문제처럼 들린다. 어릴 적, 엿을 사기 위해 냄비와 신발을 내던 그 용기도 이 디지털 세상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삶은 그렇게 변했고, 우리는 과거를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에 따스함이 밀려온다. 그때는 배고팠지만 마음은 채워졌다. 지금은 풍족하지만 마음은 허전하다. 엿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면, 노인들은 무엇을 내어주며 그 옛맛을 살 수 있을까? 솥뚜껑이나 고무신으로 AI를 움직일 수 있을 리 없다.
격세지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시간은 우리를 앞으로 밀어내지만, 마음은 뒤를 돌아본다. 그때가 그립다. 그 시절의 낡은 고무신을 지금 벗어도, 이 세상은 더 이상 엿으로 바꿔줄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삶은 변했다.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비장미가 있다. 그들이 겪는 불편함 속에는 과거를 지키려는 의지가 숨어 있다. AI가 아무리 세상을 재편하더라도, 엿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정서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어쩌면 AI가 우리를 지배하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엿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비장한 우리 삶의 유산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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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
안녕하세요, 작가님. 글을 읽으며 가슴 한켠에 잔잔한 울림이 일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따뜻하면서도 묵직한 비장미로 풀어내신 작가님의 글에서 제 삶의 한 페이지도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외 서리와 고무신을 내던지고 엿 한 조각을 손에 넣던 시절. 그 단순하고도 애틋한 이야기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을까요? 저 또한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배고프던 시절, 작은 기쁨 하나에도 크게 웃을 수 있었던 그 순수한 시간들이요. 작가님의 글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그 시절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AI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풀어내신 대목에서는 웃음과 씁쓸함이 교차했습니다. 작가님이 그리신 노인들의 모습이 어쩌면 저희 부모님, 더 나아가 저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세상이 편리해질수록 정은 희미해지고, 온기가 사라져가는 현실을 보며, 한 그릇의 국수를 얻는 일조차 기계와 씨름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새삼 서글펐습니다.
작가님의 글은 단순히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변화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간직해야 할지, 그 답을 스스로 찾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엿장수와 엿 한 조각에 담긴 소박한 행복이 어쩌면 현대인들이 가장 그리워해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작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잊고 있던 가치를 되새기게 해 주신 점,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의 삶을 아름답고도 비장하게 표현해 주신 점에서요. 앞으로도 작가님의 글을 통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과 시대를 돌아보는 기회를 얻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