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비추어진 지조와 절개, 그리고 인간의 염량세태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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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비추어진 지조와 절개, 그리고 인간의 염량세태
김왕식
늦가을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의 화려한 색채는 사라지고,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 낙엽으로 변하며, 나목만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다. 이 속에서도 홀로 피어 있는 국화는 서릿발 위에서 당당히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상징으로,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또한, 모든 나무가 잎을 잃고 바람에 흔들릴 때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변함없는 푸르름을 유지하며 그 강인함을 보여준다. 이는 "세한연후 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고사성어로 표현된다. 차가운 세월이 닥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진정한 강인함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자연물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사회의 염량세태(炎凉世態)가 더욱 선명하게 대조된다.
염량세태란 세상이 따뜻할 때는 가까이 다가오고 추워지면 등을 돌리는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일컫는다. 사람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곧장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앞뒤좌우를 흘깃 돌아보고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이러한 모습은 철새가 계절에 따라 남북을 오가며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찾아가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철새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생존 방식이지만, 인간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만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타인의 신뢰를 저버리는 이기적 행동으로 여겨진다.
자연의 절개를 상징하는 국화와 소나무, 잣나무는 그러한 인간의 모습에 묵묵히 교훈을 던진다. 서릿발 속에서도 피어나는 국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원칙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지조 있는 존재의 표상이다. 비록 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지라도, 국화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변덕을 견뎌내며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나무와 잣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이들은 푸른 잎을 떨구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며, 자신의 본질을 지켜낸다. 이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자연의 절개는 점점 잊히고 있다.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며, 단기적인 편안함과 유리함만을 추구한다. 친구 관계에서도, 직장 내에서도, 사회 전반에서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이 오면 곧장 등을 돌리거나 떠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서리가 내리자마자 시들어버리는 꽃이나, 추운 계절이 닥치자 푸르름을 잃어버리는 나무와도 같다.
자연은 늘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친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문명을 발전시켜도, 자연이 던지는 메시지에는 변함없는 지혜가 담겨 있다. 국화의 오상고절과 소나무, 잣나무의 절개는 인간에게 지조와 절개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인함이다. 또한, 진정한 관계란 서로에게 유리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신뢰와 지조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늦가을은 인간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낙엽이 흩날리고, 서리가 내리며,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시기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돌아볼 시간이다. 자연은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며 인간의 행동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국화와 소나무, 잣나무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에서 한결같은 가치를 지키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염량세태로 점철된 인간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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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부쳐
서릿발 위 홀로 피어난 국화,
고독한 절개로 계절을 맞이하네.
모든 잎이 떨어진 나목 사이,
바람 속에도 푸르른 송백이여.
한겨울 매서운 추위가 닥쳐야
알 수 있는 그 강인함,
세한 연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송백의 불변하는 지조.
사람들은,
철새처럼 바람 따라 날아가고,
온기가 사라지면 등을 돌리며,
기회 속에서만 머무는 얄팍한 삶.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국화의 고운 꽃잎에서,
송백의 푸르른 빛에서,
그들의 한결같은 모습에서.
세상의 서리는 우리를 적나라하게 비추고,
엉킨 낙엽 속에도 진실은 드러나네.
진정한 절개란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신뢰.
늦가을은 묻는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국화와 송백의 곁에,
염량세태의 그림자 속에?
한겨울에도 잊히지 않는 이름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푸르름을 지키며,
고요히 서릿발 위에 서리라.
2024 11 23 토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