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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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처럼
시인 주광일
가을은 슬며시 끝난다
눈 깜빡할 사이
어디론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나 가을이 남기고 간
나는 대낮 하늘의 낮달처럼
여기 그대로 머물고 있다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다
만물은 고요 속에
흰 눈을 기다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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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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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일 시인의 글은 간결하고 담백하다.
그의 삶이 그렇다.
글은 작가 인품의 결과물이다.
주광일 시인은 유독 자연의 흐름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흔히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순간과 영원의 경계를 예민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주 시인은 사라지는 가을과 남겨진 낮달이라는 대비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고독을 섬세하게 형상화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삶의 무상함과 존재의 지속성을 동시에 탐구하려는 시인의 철학적 성찰과 맞닿아 있다.
“가을은 슬며시 끝난다”
가을이 끝나는 순간을 '슬며시'라는 부사로 표현하며, 자연의 변화가 거칠거나 극적인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각적 경험의 섬세함을 드러낸다.
“눈 깜빡할 사이”
가을의 종말은 순간적으로 다가온다. 이는 시간의 빠른 흐름과 인간이 그것을 붙잡지 못하는 한계를 상기시킨다. '눈 깜빡할 사이'라는 표현은 긴 시간의 압축적 이미지를 제공하며, 덧없음의 미학을 구현한다.
“어디론가 /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을이 떠나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의 순환이 신비롭고 초월적인 차원임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자연의 질서를 연결 짓는다.
“가버린다”
짧고 단정적인 어조가 이전의 서정성을 끊으며, 변화와 상실의 불가역성을 강조한다. '가버린다'는 한 단어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자연과 인간의 분리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가을이 남기고 간 / 나는 대낮 하늘의 낮달처럼”
가을이 사라졌지만 남겨진 자신을 '낮달'에 비유한다. 낮달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희미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느끼는 존재론적 고독과 부조화를 상징한다.
“여기 그대로 머물고 있다 /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다”
'머문다'와 '서성거린다'는 단어는 정체된 상태를 드러낸다. 이는 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난 인간의 위치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며, 고독과 방황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만물은 고요 속에 / 흰 눈을 기다리는데”
마지막으로 자연은 이미 다음 계절인 겨울을 준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연은 순환하지만, 인간은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홀로 멈춰 있다. '흰 눈'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며 자연의 질서와 대비되는 인간의 고독을 더욱 부각한다.
이 시는 사라지는 가을과 남겨진 인간이라는 대조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차이를 탐구한다. 시인은 가을의 변화 과정을 슬며시, 고요히 그려내며, 이를 통해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내적 방황을 암시한다. 낮달은 존재하지만 뚜렷하지 않은 상태를 상징하며, 인간의 정체성과 고독을 한층 더 명확히 한다.
주광일 시인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여, 감정과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슬며시’, ‘눈 깜빡할 사이’, ‘서성거린다’와 같은 표현은 변화와 정체의 미묘한 대립을 선명히 드러낸다. 또한 가을과 겨울의 대비는 순환적 자연 질서와 정체된 인간 사이의 괴리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이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소외를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주광일 시인의 독창적인 미학이라 할 수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