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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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묻힌 고향
수필가 안봉근
낙향한 지 몇 해가 흘렀다.
도시의 분주함을 뒤로하고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 삶은 한낱 작은 정원을 가꾸며 시작되었다. 울타리 곁에는 어린 감나무를 심었다. 매일 돌보고 물을 주며 기다린 시간이 어느덧 결실을 맺었다. 올해는 가지마다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가지가 무거워도 그 풍성함이 사랑스러웠다. 나의 작은 정원이 드디어 완성된 듯싶었다.
어젯밤, 고요하던 밤하늘이 눈발로 가득 찼다. 함박눈은 춤추듯 내리더니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따스한 이불속에서 잠든 사이, 감나무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아침에 나가 보니 부러진 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찬란했던 주홍빛 열매는 흩어진 눈 속에 파묻히고, 그 옆에는 울타리마저 기운 채로 쓰러져 있었다.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다.
온 세상은 백설로 덮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풍경 속에서 동네 강아지가 신이 나 뛰놀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고향은 노인들만이 남은 마을이 되어 버렸다. 마을회관에서는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이 조용히 전기난로 곁을 지키고 있다. 이따금 눈길을 걸어 마주치는 모습은 마치 흰 눈 속에 묻힌 작은 언덕들처럼 보인다.
감나무는 부러졌지만, 다시 봄이 오면 그 자리에 새 가지가 돋아날 것이다. 나무는 그렇게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내 고향, 눈 속에 잠긴 이 마을은 과연 다시 봄을 맞을 수 있을까. 희미해져 가는 골목의 추억은 잊히지 않고 나를 붙든다.
낙향의 삶은 낭만만으로 가득하지 않다. 쓰러진 감나무와 구부러진 허리, 그리고 사라져 가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낭만과 애환을 함께 짊어진다. 눈 속에 묻힌 마을은 깊은 잠을 자는 듯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생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문득 눈길 위를 걸으며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기억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는 발자국 같다.
눈이 녹으면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이 흰 세상 속에서 작은 온기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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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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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근 작가의 수필 '눈 속에 묻힌 고향'은 낙향 이후의 삶을 통해 자연과 삶의 본질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고향이라는 공간에 얽힌 감정과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 작품이다.
글은 작가의 내밀한 삶의 단면과 이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속에서 낭만과 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며,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함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낸다.
작품의 서두에서 감나무를 심고 돌보며 결실을 맺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한 정원 가꾸기를 넘어 삶의 근원적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감나무 가지마다 달린 주홍빛 열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반영한다. 그러나 눈 속에 부러진 감나무와 흩어진 열매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상기시키며, 삶의 덧없음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다시 봄이 오면 새 가지가 돋아날 것"이라는 문장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고향 마을의 묘사는 작품의 정서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눈 속에 잠긴 마을과 마을회관에 모인 어르신들의 모습은 잃어가는 전통적 삶의 풍경을 조용히 담아내며, 독자로 소멸해 가는 시간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
"눈 속에 묻힌 작은 언덕들처럼 보인다"는 표현은 그들의 존재를 자연과 동화시키며 깊은 서정을 자아낸다.
이러한 정적 속에서도 작가는 "눈이 녹으면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작품은 단순히 고향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는다. 부러진 가지, 쓰러진 울타리, 그리고 사라져 가는 기억들은 작가가 고향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이중적 감정을 나타낸다. 낭만적 풍경 속에 깃든 현실적 고통과 애환은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부서지는 소리는 오래된 기억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는 발자국 같다"는 문장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통로처럼 작용하며, 추억 속에서도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작가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안봉근의 글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이는 눈 속에 묻힌 고향이라는 정지된 풍경 속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깊은 성찰이다. 그의 글은 고향을 단순히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고, 변화와 소멸의 현실을 직시하며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독자는 이 글을 통해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다시 돌아올 생명력에 대한 기대를 동시에 느낀다. 작가는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고향과 삶을 재해석하며, 이를 섬세하고 진솔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