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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ㅡ 시인 임보선

김왕식
















시인 임보선




사방이 벽인데
삭신이 녹아도
부딪치는 벽뿐
기댈 벽 없다

터지도록 찢어지도록
온몸으로 허문 벽
문이 되었다

바람은 문으로
햇빛도 달빛도
초대해 자유로이 놀고 있다

아물고 아문 문신 같은 흉터
허공에 걸려 있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임보선 시인은 삶의 고통과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이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시에 담아내는 작가이다.
그의 시에는 내면의 상처와 극복의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자유와 치유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다.
특히 '벽'에서는 절망을 딛고 문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의 미의식과 삶의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고통을 시적 형상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가치를 탐구하는 그의 작품 세계가 돋보인다.

"사방이 벽인데"

첫 행은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현실을 간결하게 제시한다. ‘사방’과 ‘벽’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을 암시하며, 존재적 한계와 고립감을 함축한다. 이 표현은 독자에게 즉각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벽이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정신적 억압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시의 핵심 모티프를 암시한다.

"삭신이 녹아도"

삶의 고통과 소모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삭신’과 ‘녹아도’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진의 극한을 드러낸다. 이는 벽에 부딪치며 소멸해 가는 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고통의 나열이 아니라 이후의 변화를 암시하는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부딪치는 벽뿐"

절망의 반복성과 피할 수 없는 현실을 강조한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 독자는 벽의 강도와 불가항력성을 더욱 체감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현실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이후 등장할 전환점의 대비를 강화한다.

"기댈 벽 없다"

의지할 곳조차 없는 고립감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벽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며, 장애물이자 의지처로 작용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벽은 의지처의 가능성조차 박탈된 상태를 묘사하며,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을 상징한다.

"터지도록 찢어지도록 /
온몸으로 허문 벽"

고통의 극한을 넘어 벽을 허무는 과정이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터지도록’과 ‘찢어지도록’은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강조하며, 그 과정을 시각적으로 선명히 보여준다. 이는 시인의 가치 철학인 자기 초월의 과정을 구체화한다.

"문이 되었다"

전환의 순간을 단 한 줄로 명료하게 제시한다. 벽을 허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새로운 출구와 자유로 변모하는 순간을 함축한다. 이는 시의 주제 의식을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대목으로, 고통의 의미와 치유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바람은 문으로 /
햇빛도 달빛도 /
초대해 자유로이 놀고 있다"

벽이 문으로 변모하면서 등장하는 자유의 이미지를 그린 부분이다. 바람, 햇빛, 달빛은 자연의 요소로, 해방감과 치유를 상징한다. ‘초대’와 ‘자유로이 놀고 있다’는 경쾌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고통 이후의 회복과 자유를 암시한다.

"아물고 아문 문신 같은 흉터 /
허공에 걸려 있다"

벽을 허물고 얻은 문이 남긴 상처를 암시한다. ‘문신 같은 흉터’는 고통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완전한 치유가 아닌 상처의 수용을 보여준다. 이는 허공에 걸린 모습으로 형상화되며, 고통의 초월적 가치를 상징한다.

임보선 시인의 '벽'은 폐쇄적 현실 속에서 고통을 견디고 이를 초월해 자유와 치유를 얻는 과정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임보선 시인은 단순히 고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초월적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을 구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로 풀어낸다. 특히 벽과 문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고통과 자유의 긴밀한 연관성을 드러냈다.
임보선 시의 미학은 고통을 단순히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유를 얻는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독자에게 고통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준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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