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06. 2024
조안석 화백
ㅡ 숲과 바람, 그리고 색채의 교향악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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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석 화백
ㅡ 숲과 바람, 그리고 색채의 교향악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이칼호 근처, 겨울의 자작나무 숲은 고요 속에 숨 쉬는 생명을 품고 있다. 눈이 쌓여 온 세상을 감싸는 그 설원은 회색빛으로 가득하다. 자작나무의 우듬지엔 상고대가 걸리고, 그 아래 숲은 은빛 무늬를 새긴 듯 서 있다. 정비석 작가가 말한 대로, 자작나무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 숲 속의 공주"다. 겨울바람이 숲 사이를 헤쳐 지나갈 때, 바람 소리는 교향악이 되어 울려 퍼진다. 조안석 화백의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 울림과 닮았다.
그의 삶과 예술 속에는 정중동(靜中動)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멈춰 있는 듯하지만, 안에서 흐르는 강렬한 생명력. 움직임이 없지만, 모든 움직임의 시작이 되는 고요한 중심. 이 철학은 그의 작품 속에 선명히 드러난다. 흰색과 회색으로 채워진 설원 위, 청빛이 감도는 순간의 파격은 그의 예술 세계를 상징한다.
회색은 정(靜)이다. 자작나무 숲의 고요함과 같은 정적의 미학, 시간이 멈춘 듯 흐르는 순간의 무게를 담아낸다. 그는 그 안에 있는 무수한 결의 깊이를 탐구하며, 단순함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끌어낸다. 순백의 설원에 스며드는 회색은 사색과 침잠의 공간이다. 그것은 자연의 언어를 통해 조안석 화백이 전하는 진리, 침묵 속에서도 말하는 예술의 본질이다.
청색은 동(動)이다. 회색의 질서를 뚫고 나오는 찰나의 생명력, 정적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움직임이다. 청빛은 그의 작품 속에서 파격의 순간으로 등장한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 위에 새겨지는 이 색은 관객에게 새로운 차원의 울림을 던진다. 이는 곧 그의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고요 속에서 움직임을 발견하고, 움직임 속에서 다시 고요를 찾아가는 순환의 미학이다.
그의 화폭에 펼쳐진 설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의 풍경이며, 관조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다. 하얀 눈과 회색의 자작나무는 삶의 순환을 말한다. 얼어붙은 나뭇가지에도 생명이 잠들어 있음을,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봄의 온기가 숨어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색채는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담은 메시지다.
조안석 화백의 예술은 단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깊은 철학과 맞닿아 있다. 자작나무 숲 사이를 스치는 겨울바람처럼, 그의 작품은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정과 동, 흰색과 회색, 그리고 청빛의 조화는 그의 삶이자 예술의 본질이다.
숲 속의 교향악은 여전히 울려 퍼진다. 자작나무의 고요한 속삭임은 그가 남긴 미학의 선율과 같다. 겨울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생명의 시작이 있다. 조안석 화백의 삶은, 그 숲과 바람과 색채의 어울림처럼 완벽한 교향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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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겨울의 교향악 속에서
조안석 화백님께,
오늘 저는 인제의 자작나무 숲을 걸었습니다. 조 화백님의 그림 속에서 느꼈던 그 고요와 파격이 이곳에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숲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자작나무의 하얀 몸체는 겨울바람 속에서도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상고대霜高帶가 그려낸 섬세한 무늬는 숲의 깊이를 더하며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숲은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소리는 단순히 바람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숲이 화백님의 붓끝에서 전했던 교향악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요하지만 강렬한 울림이 있었고, 그 안에서 제 마음은 고요와 동요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습니다. 회색의 설원 속에 스며든 청빛의 파격, 그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실제 숲에서도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일 때, 흰빛과 청빛이 어우러져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화백님이 말한 정중동 靜中動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작나무 숲은 정적 속에서 생명을 숨기고 있었고, 그 생명은 언젠가 다시 움직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무들은 겨울의 고요를 품으면서도, 땅속으로 뻗어 있는 뿌리의 생동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고요와 생동의 이중주가 숲 전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조안석 화백님, 이 숲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철학을 담고 있는 한 편의 시였습니다. 자작나무는 겨울에도 서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겸손함과 고요 속의 강인함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작품을 통해 그 숲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제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숲을 걸으며 느낀 모든 것이 당신의 작품과 닿아 있었습니다. 자작나무의 하얀 속살과 바람 소리의 교향악,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삶의 메시지까지. 화백님이 남긴 예술의 울림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숲을 걸으며, 화백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이 글을 남깁니다.
자작나무 숲의 고요와 바람의 선율 속에서,
화백님의 예술을 기억하며.
한 산책객이 드립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