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자작나무* 숲에서는 ㅡ 시인 정해란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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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자작나무* 숲에서는
시인 정해란
바람만 가득 눈 뜬
한겨울 자작나무 숲 속
언 땅 디딘 시린 발
칼날 된 바람이 갈기갈기 채찍질해도
한 겹도 젖지 않고 하얀 나목으로
깊은 어둠마저도 밝게 지키는 그 기품
때로 불쏘시개로 문명의 풀무가 되고
때론 화촉으로 사랑의 풀무가 되어
수피(樹皮) 한 겹 한 겹 벗겨
달빛 동봉한 연서에서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판까지
사랑도 역사도 써 내려가라고
젖지도 썩지도 않고
흰옷의 백작처럼 그리 당당했나 보다
자작나무숲에서는
텅 빈 어두움과 깊은 고독 속에서도
그 바람이 여전히 맑게 눈 뜬 채
숲을 돌고 돌아 필사한 문장들이
나무로 서서 그리 하얗게 빛을 뿜나 보다
저마다의 이름을 낱낱이 세워, 갈 길 밝혀주면서
- 제3시집 『시간을 여는 바람』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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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나무 쓰임 : 껍질이 하얗고 윤이 나며 종이처럼 얇게 벗겨져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썼다. 결혼식 때 화촉(華燭)을 밝히는데도 쓰임.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의 일부도 자작나무가 재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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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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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란 시인은 성품이 곱다. 섬세하고 깊다.
모든 사물을 따뜻한 시선으로 깊게 살핀다.
이번 시 '겨울 자작나무 숲에서는'도
역시
깊게 살핀 결과물이다.
겨울 자작나무 숲을 통해 삶의 본질과 문명의 유산을 깊이 있게 성찰하며, 그 속에 담긴 고결한 가치를 시적으로 펼쳐 보인다. 자작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명, 그리고 영혼의 울림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발견되는 고귀한 생명력과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교차시키며 시인의 미적 감각을 드러낸다.
첫 연에서는 겨울 자작나무 숲의 이미지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바람만 가득 눈 뜬” 자작나무 숲은 고독과 고통을 품으면서도 순백의 기품을 잃지 않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칼날 된 바람"과 "갈기갈기 채찍질"이라는 표현은 자연의 혹독함을 강렬하게 그려내지만, 자작나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빛을 지키는 "하얀 나목"으로 묘사된다. 이는 시인의 눈에 비친 자작나무의 생명력과 초월적 품격을 상징한다.
둘째 연에서는 자작나무의 쓰임새를 통해 인간 삶과 문명에 기여해 온 역사를 시적으로 확장한다. 자작나무는 "불쏘시개"로, "화촉"으로, 그리고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재료로 사용되며, 사랑과 역사, 지혜를 기록하는 매개체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달빛 동봉한 연서"라는 표현은 자작나무 껍질 위에 기록된 감성과 지혜를 은유하며, 나무껍질의 희생을 통해 인류가 쌓아온 문화적 깊이를 드러낸다. "젖지도 썩지도 않고 흰옷의 백작처럼"이라는 구절은 자작나무가 보여주는 고결함과 당당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찬미하는 시인의 미의식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은 자작나무 숲을 둘러싼 고독과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그 숲의 존재를 강조한다. "필사한 문장들이 나무로 서서"라는 표현은 자작나무를 단순한 자연물에서 벗어나 하나의 창조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승화시킨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저마다의 이름"을 지니며 인간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 서 있다는 묘사는 시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며, 자작나무 숲이 인간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명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조화를 자작나무를 통해 형상화한다. 특히 자작나무의 순백의 색과 고유한 쓰임새는 시인의 미적 감각을 통해 숭고한 상징으로 승화되었다. 자작나무의 "젖지도 썩지도 않는" 특성은 삶 속에서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 정신의 표상으로 읽힌다.
정해란 시인의 이 시는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 속에 깃든 영혼과 역사의 가치를 탐구한다. 자작나무 숲은 고독 속에서도 빛나는 정신적 지표이자, 시인의 깊은 미의식이 담긴 예술적 공간으로 구현된다. 삶의 가치와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담아낸 이 작품은 독자로 자신의 삶과 환경을 성찰하게 만드는 고귀한 시적 경험을 제공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