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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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렴 안에 드니
시인 정 순 영
거리에서 밀실에서 말들이 얼룩덜룩 무성한
세상의 먼지를 툭툭 털고
주렴 안에 드니
청산이 물소리 장단으로 자연의 이치를 소리하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속에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세상을 헤아려 유유히 흐르는 강
햇살 한 줌이면 윤슬로 조잘조잘 소리하네.
산사의 목어를 두드리고 돌아오는 바람은
청명한 소리를 얻어 한풀이 소리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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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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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인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시적 철학을 지닌 원로 작가이다.
그의 시는 화려한 언어의 장식보다 자연의 섭리를 직관적으로 담아내며, 겸허한 태도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 예찬을 넘어 ‘고요한 관조’를 통해 세상과 나를 정화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과 닿아 있다. '주렴 안에 드니'는 이러한 시인의 가치관을 담아 세속의 번잡함을 떠나 자연의 소리와 이치를 듣고 깨닫는 과정을 그려낸다.
첫 행 “거리에서 밀실에서 말들이 얼룩덜룩 무성한 / 세상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현대인의 소음 가득한 삶을 상징한다. ‘거리’와 ‘밀실’은 외적·내적 번잡함을 모두 포함하며, 얼룩진 말들은 세상의 혼탁함과 피로를 암시한다. 시인이 ‘먼지를 털고’ 주렴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속세를 벗어나 내면의 평온을 찾아가는 의지를 드러낸다.
“주렴 안에 드니 / 청산이 물소리 장단으로 자연의 이치를 소리하네.” 여기서 주렴은 속세와 자연을 가르는 경계이며 동시에 깨달음의 문이다. 청산의 물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담은 소리로, 시적 주체에게 깨달음을 전한다. 이는 자연이 가진 고요한 질서 속에서 얻어지는 평온과 통찰을 상징한다.
세 번째 행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속에 / 해가 지면 달이 뜨고”는 자연의 작은 현상에서 거대한 순환의 이치를 발견하는 섬세한 시선이 돋보인다. 이슬 한 방울은 미세한 존재이지만 그 속에 해와 달이 교차하며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함축한다. 시인의 미의식은 이러한 작은 것에서도 우주의 질서를 읽어내는 데 있다.
이어지는 “세상을 헤아려 유유히 흐르는 강 / 햇살 한 줌이면 윤슬로 조잘조잘 소리하네.”는 강물의 흐름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강은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순리를 상징하며, ‘햇살 한 줌’이 만든 윤슬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기쁨과 조화로운 소리를 찾는 시인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는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삶의 번잡함을 위로하려는 시인의 의도다.
마지막 행 “산사의 목어를 두드리고 돌아오는 바람은 / 청명한 소리를 얻어 한풀이 소리를 하네.”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소리를 연결하는 정점이다. 목어를 두드리는 행위는 번뇌를 깨뜨리는 수행이며, 바람은 그 과정에서 청명한 소리를 얻어 한을 풀고 돌아온다. 이는 인간의 번뇌와 슬픔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정순영 시인의 '주렴 안에 드니'는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리와 이치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정화하려는 의식을 담아냈다. 시어의 선택은 단아하고 자연스럽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깊이 있다. 풀잎의 이슬과 강물의 흐름처럼 작고 소박한 것에서 거대한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철학이 시 전반을 관통한다. 다만, 일부 표현에서 명시적이거나 설명적인 부분이 있어 시적 긴장감이 약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풀이 소리를 하네”는 독자가 스스로 여백을 채울 수 있도록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면 더욱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미적 가치는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에 있다. 물소리, 목어 소리, 바람 소리 등 청각적 이미지는 자연의 고요한 목소리를 생생히 전달하며, 이는 번잡한 현실 속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울림을 준다. 시인 정순영 시의 핵심은 이러한 관조적 시선이 단순한 자연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삶의 철학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