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철 화백의 '지금, 여기의 길'을 청람 평하다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17. 2024
■
지금, 여기의 길
장상철 화백
눈이 내려 녹아서
물이 되고,
그 물 위에 비친
그림자의
투명한 잔영처럼
의식의 언어 안에
머무는 일상은
그리 길지 않다....
별은
저곳에
있는 듯하나
빛은 여기에 있다.
물상의 티끌이
가슴에 깊게 머물면
여기에 있는 것도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여기의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지나온 길이며,
현재와 이어지는
과정일 뿐임에도
그 길을
바라본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장상철 화백은 생의 고통과 경계를 넘어서 예술로 승화하는 삶을 살아왔다. 병마와 싸우며 남긴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 삶의 철학과 미의식이 깊이 담긴 결과물이다.
이 시에서 작가는 순간과 영원, 물리적 현실과 내면의 경계를 초월하는 의식을 드러낸다. 삶의 유한함 속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투명하게 비추어내고, 현실 너머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의 흔적을 남긴다.
“눈이 내려 녹아서
물이 되고,
그 물 위에 비친
그림자의
투명한 잔영처럼
의식의 언어 안에
머무는 일상은
그리 길지 않다….”
여기서 ‘눈이 녹아 물이 되는 과정’은 생의 덧없음과 순환을 상징한다. 그 물 위의 그림자는 순간적으로 존재하지만 곧 사라지는 ‘일상’의 투명한 흔적과 닮았다. ‘의식의 언어’란 작가의 사유가 머무는 자리지만, 일상의 유한함을 강조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자각과 무상함을 표현했다.
“별은
저곳에
있는 듯하나
빛은 여기에 있다.”
‘별’은 현실 너머 존재하는 이상적 세계를 상징하며, ‘빛’은 지금 여기에 있는 현재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이 현실에 빛을 비추는 것은 존재의 본질과 삶의 깨달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구절은 삶의 중심을 현재에 두되 영원을 향해 사유하는 작가의 철학을 잘 드러낸다.
“물상의 티끌이
가슴에 깊게 머물면
여기에 있는 것도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상의 티끌’은 현실 세계의 사소하지만 깊은 울림을 상징한다. 이것이 가슴에 머물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해 ‘여기’와 ‘거기’를 구분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이는 물아일체(物我一體)적 경지, 즉 현실과 의식이 하나 되는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내면의 평온과 진리를 찾으려 한다.
“지금
여기의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지나온 길이며,
현재와 이어지는
과정일 뿐임에도
그 길을
바라본다.”
여기서 ‘길’은 삶의 노정을 의미한다. ‘쉬운 길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작가가 투병 속에서도 견뎌온 고통의 시간을 나타내지만, ‘지나온 길’과 ‘과정’으로 묘사하며 삶을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승화한다. 이 구절은 현재를 성찰하며, 존재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작가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존재와 의식, 현실과 본질의 경계를 초월하려는 장상철 화백의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순간과 영원을 연결하는 이미지들이 시 전체에 유기적으로 배치되며 삶의 덧없음과 깊이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특히 ‘눈-물-그림자’의 투명한 상징은 생의 순환과 무상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별-빛’의 대비는 이상과 현실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다만 일부 표현에서 더 직관적인 이미지가 부족한 점은 아쉽다. 예를 들어 ‘물상의 티끌’이나 ‘의식의 언어’는 지나치게 관념적이라 독자가 시각적으로 즉각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부분을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다듬는다면 시의 감성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작가가 투병이라는 현실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태도에 있다. 장상철 화백은 물질적 현실 너머를 향해 가는 의식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길을 묵묵히 바라본다. 시의 언어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미의식과 철학이 이 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현재와 이어지는 과정일 뿐임에도 그 길을 바라본다.”라는 마지막 행은 작가의 삶과 투병의 자세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장상철 화백은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의식의 여정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일깨우며, 독자에게도 생의 의미를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