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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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휴암에 가 보라
시인 박은경
울림통인 종각 아래서 합장을 한다
우연 속의 필연일까
내 안의 당신이 풍랑과 같이 솟구치는 감정을
잠재우지 못하고 끙끙거릴 때
미움으로 살을 후벼 파듯 상처 낼 때
종소리의 공명효과로 격양된 감정의 파도는
너울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잠잠해진다
연화대에서 물고기를 방생하듯
일상의 번뇌를 내려놓고 쉬어 가라는 듯
마음 찌꺼기는 동해 푸른 바다 너머로
흘러 보내라는 듯이
황어 떼는 파닥파닥 물을 찬다
선정에 들었는가
3번의 종소리 울림으로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가슴이 뚫리는 환희
욕심의 쓰레기통 흘러가는 소리가 울린다
기어가고 기어 나오면서 달라지는 마음가짐
휴휴암에 가서 스님을 뵙거든
합장하고 종 밑으로 기어들어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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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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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시인은 삶의 번뇌를 자연과 영적인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명상적 시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그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초월적 경험의 조화를 추구하며, 독자에게 삶의 성찰과 치유를 제안한다. '휴휴암에 가 보라'는 자연과 종교적 상징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갈등을 정화하고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시인의 철학은 단순히 고통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며 그것을 초월로 이끌어내는 데 있다.
시의 첫 행은 울림통 같은 종각 아래 합장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종각은 시적 공간을 넘어 신성한 울림의 상징으로, 독자를 영적인 여정으로 초대한다. 합장의 제스처는 시인의 겸손과 기원의 태도를 보여주며, 이후의 정화 과정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우연 속의 필연일까”라는 물음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묻는 이 구절은 독자에게도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의 중반부는 인간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구체적이고 강렬한 비유로 그린다. “미움으로 살을 후벼 파듯 상처 낼 때”라는 표현은 번뇌와 고통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이를 정화하기 위한 종소리의 역할을 부각한다. 종소리는 단순히 물리적 공명이 아니라, 감정적 정화와 치유를 상징한다.
이 과정은 “너울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잠잠해진다”는 표현으로 이어지며, 시인이 경험하는 내적 평화의 시작을 나타낸다.
연화대에서의 방생은 불교적 상징으로, 집착을 내려놓고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음의 찌꺼기를 동해 푸른 바다로 흘려보내는 이미지는 독자에게도 정화의 경험을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황어 떼는 파닥파닥 물을 찬다”는 구절은 정적인 정화를 넘어 생명력과 역동성을 강조하며, 치유와 재생의 과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한다.
시의 후반부에서 “선정에 들었는가”라는 질문은 독자에게 내면의 평온을 스스로 점검하게 한다. 3번의 종소리 울림은 반복적 정화를 통해 시인의 감정적 해방과 희열을 완성한다. “욕심의 쓰레기통 흘러가는 소리가 울린다”는 비유는 욕망을 비우는 과정을 신선하게 표현하며, 시의 주제를 더욱 분명히 한다.
마지막으로, “기어가고 기어 나오면서 달라지는 마음가짐”은 시인이 겪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겸손과 성찰을 통해 새로워지는 마음은 시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종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행위는 시인이 제안하는 내면의 낮아짐과 명상의 자세를 상징하며, 독자에게 실천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휴휴암에 가 보라'는 종소리와 자연적 이미지를 통해 치유와 해탈의 과정을 유기적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시인은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번뇌와 평화를 대비시키며, 독자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다만 마지막 구절에서 다소 직접적인 어조는 독자의 해석 여지를 제한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시인의 철학과 미의식은 감동적으로 드러나며, 독자에게 내면의 정화와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는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