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Dec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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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의 치유
시인 유숙희
바늘이 치유다
실끝날 거느리고
아픈 상처
싸매어 봉합한다
올 한 해도 다 갔다
바늘은 오늘도 제 기술
깁고 꿰매고 잇는 수술
한창 진행 중인데
그대여,
너는 올 한 해
바늘이 날마다 하는
이웃의 아픈 상처
꿰매기
몇 날에 몇 번이나
봉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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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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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희 시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사물과 행위를 통해 인간의 상처와 치유를 성찰하는 독특한 감성을 지닌 중견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삶의 본질적 아픔을 끌어안으면서도 그 안에서 희망과 위로를 발견하려는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특히, 그의 시 세계는 소박한 표현 속에 깊은 울림을 담아내며, 독자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닌다. 이 시에서 바늘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적 치유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시인의 미적 감각과 가치 철학이 조화롭게 발현된 작품이다.
“바늘이 치유다 / 실끝날 거느리고”
첫 구절에서 바늘은 단순한 물리적 도구를 넘어 상징적 존재로 격상된다. 실끝날을 거느리는 바늘은 상처를 봉합하고 이어가는 존재로 비유되며, 인간이 겪는 고통을 치유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시인은 짧은 문장 속에서 치유와 연대의 이미지를 응축적으로 담아냈다. 여기서 '거느린다'는 동사가 바늘에 생명감을 부여하며, 치유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아픈 상처 / 싸매어 봉합한다”
‘아픈 상처’는 단순히 신체적 아픔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포괄한다. 싸매고 봉합하는 과정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회복으로 이끄는 행위를 상징한다. 시의 감성은 여기서 치유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고통과 마주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상처를 피하지 않고 수용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깊은 울림을 준다.
“올 한 해도 다 갔다 / 바늘은 오늘도 제 기술”
시간의 흐름을 언급하며 바늘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위를 대비시킨다. 바늘은 매일 같은 기술로 상처를 치유하지만, 이는 단조로움이 아닌 꾸준함과 성실함을 상징한다. '제 기술'이라는 표현은 바늘의 정교함과 치유의 세밀함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삶의 연속적 과정 속에서 상처받은 존재를 이어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깁고 꿰매고 잇는 수술 / 한창 진행 중인데”
‘깁고 꿰매고 잇는 수술’은 단순한 행위 이상의 상징성을 띠며, 인간관계에서의 연결과 회복을 암시한다. 특히 ‘수술’이라는 단어 선택은 치유 과정의 진지함과 책임감을 강조한다. 여기서 바늘은 단순히 물질적 도구를 넘어, 이타적 행위와 연민의 상징으로 확장된다.
“그대여, / 너는 올 한 해 / 바늘이 날마다 하는”
이 대목에서 화자는 독자를 직접적으로 호명하며, 자기 성찰을 유도한다. 여기서 시인의 시적 화자는 단순히 바늘의 역할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행위를 독자에게 질문으로 던지며 내면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시적 경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이웃의 아픈 상처 / 꿰매기 / 몇 날에 몇 번이나 / 봉했더냐”
마지막 구절은 화자의 질문을 통해 독자를 깊이 사유하게 한다. ‘이웃의 아픈 상처’는 인간관계의 본질적 아픔과 그 치유를 떠올리게 한다.
이 질문은 독자들에게 나 자신이 치유자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묻는 동시에, 공동체적 책임감을 환기시킨다.
이 시는 소박한 언어와 친숙한 이미지로 시작하지만, 그 속에 인간 상처의 치유와 연대라는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바늘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통해 치유와 회복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독창적으로 풀어낸다.
유숙희 시인의 시 세계는 단순함 속에서 깊은 진리를 끌어내는 독창성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과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특히, 시인이 강조하는 치유와 연대의 메시지는 오늘날 소외와 단절의 시대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환기시킨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