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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01. 2025

어느 늦은 저녁 나는 ㅡ 시인 한강

김왕식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강 시인의 초기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은 그녀의 삶과 문학 전반에 걸친 사유의 깊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단순한 일상의 한 장면에서부터 존재와 시간, 그리고 무상함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끌어낸다. 한강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미적 감수성이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 번째 행에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라는 도입부는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하면서도 특정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는 곧바로 다음 행에서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라는 구체적이면서도 섬세한 이미지로 이어지며, 밥이라는 일상적 사물이 존재의 중심으로 부각된다. 여기서 밥의 이미지는 단순히 음식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삶의 지속성과 소멸, 순환을 함축한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와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라는 반복적인 구절은 시간의 본질과 존재의 무상함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특히 ‘영원히’라는 단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현재를 붙들려는 인간의 의지와 그 불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응의 태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에서 “밥을 먹어야지”라는 짧고 단호한 문장은 시 전체의 철학적 사유를 일상으로 회귀시킨다.
이는 삶의 비극성과 무상함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일상을 지속하는 인간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구조적 대비는 한강 문학의 미적 특징 중 하나로, 보편적 인간 경험을 담담하면서도 강렬하게 전달한다.

한강 시인의 삶은 작가로서의 내면적 탐구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채워져 있다. 그녀는 세상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응시하며,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 왔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단순히 텍스트를 넘어 독자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역시 작가가 지닌 이러한 철학적, 미적 태도를 응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밥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통해 삶의 무게와 가벼움, 비극과 희망을 동시에 전달한 이 작품은 인간 존재에 대한 한강의 깊은 통찰과 문학적 미학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삶이라는 무상한 흐름 속에서도 밥 한 공기에서 희망을 찾는 작가의 성숙한 시선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한강의 시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이는 단지 예술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준다.



2025 1  1  수


ㅡ 청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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