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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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날들
한강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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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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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시 '조용한 날들'은 깊은 내적 고뇌와 삶에 대한 관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시인은 생명이 없는 돌을 통해 생명의 무게를 돌아보며, 고통과 소외 속에서 스스로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 작품은 생명의 본질, 고통, 관계 부재에 대한 성찰을 담은 동시에, 한강의 작가적 삶의 가치 철학과 미의식을 잘 드러낸다.
한강은 생명과 고통, 그리고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 세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문학은 인간이 가진 상처와 회복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삶의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한강의 작품은 삶의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이를 인간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깊은 사유와 성찰을 이끌어내는 데 특징이 있다. 이 시에서도 고통과 상실, 그리고 소외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담담하게 응시하며, 그 안에서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 시는 간결한 언어와 이미지로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한다. 담 밑에서 발견한 '하얀 돌'은 생명이 없는 사물로서 고통에서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시인은 돌을 들여다보며 생명과 죽음, 관계와 단절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라는 구절은 생명이 가진 고통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생명이 없다는 사실이 돌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만든다는 역설은 시인의 내적 갈등과 공허를 극명히 드러낸다.
돌의 '하얀 환한 언저리'와 '피 흘린 해'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시적 화자의 내적 풍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한강 특유의 미의식, 즉 고요함 속에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감정의 깊이를 전달하는 기법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돌에 손을 뻗지 않음으로써 관계와 연결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단절된 인간관계와 고통 속에서의 방황을 상징하며, 이는 시인의 작품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한강의 '조용한 날들'은 고통과 소외, 그리고 생명과 죽음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돌이라는 생명이 없는 존재를 통해 생명의 고통과 부재의 평온함을 대조하며, 존재와 관계의 의미를 묻는다. 시의 담담한 어조 속에서도 느껴지는 강렬한 정서와 이미지의 대비는 한강의 미의식을 잘 드러낸다. 이는 고통 속에서도 삶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하는 작가의 가치 철학과 맞닿아 있다. 한강의 시는 단순히 읽는 이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을 넘어,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조용한 날들은 그러한 작가적 미학과 철학의 정수를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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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께
작가님의 시 '조용한 날들'을 읽으며 생명과 고통, 그리고 관계의 부재 속에서 스스로와 마주하는 작가님의 시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시선이 어쩌면 담담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강렬한 정직함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녹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하얀 돌’을 마주한 화자는 생명이 없는 존재의 고요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생명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라는 구절은 단순한 부러움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이 고통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곧 관계와 의미가 부재한 세계이기도 합니다. 생명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유와 연결됨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가님의 시는 저를 담장 밑 그 하얀 돌 앞에 앉게 했습니다. 돌을 들여다보며, 나 역시 "마주 보는 눈이 없다"는 말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절과 소외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쩌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손을 뻗지 않겠다는 결심 속에는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고통 속에서 찾은 나름의 평온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시를 읽고 나서 한동안 저 역시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손을 뻗는 것을 멈추었던 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삶의 길 위에서 지워지는 순간들을 받아들이는 화자의 자세는, 단순히 체념이 아니라 존재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용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고통과 단절의 순간에도 고요하게 응시하는 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시를 통해 던지신 질문들이 오랫동안 제 마음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생명과 고통, 관계와 단절, 그리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존재의 의미는 여전히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바로 살아가는 것임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작가님의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언어의 조합을 넘어, 독자의 내면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문학이 가진 위로와 통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작가님께서 펼쳐가실 이야기들이 기다려지며, 또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성찰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