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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안개에 젖어

김왕식








파리는 안개에 젖어




밤새 하늘은 조용히 눈을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눈부신 하얀빛 속에서 세상은 소복하게 자신을 감싸 안고 숨을 죽였다. 마치 자연이 준비한 이불 속에 들어간 듯, 차가운 겨울의 품은 따뜻한 고요를 선물했다. 아침이 되자, 하늘이 개었다.

맑아진 하늘 아래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온 세상을 덮은 안개는 모든 것을 감추고, 또 모든 것을 부드럽게 연결하며 새로운 차원의 풍경을 열어 주었다. 고요한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문득 떠오른 것은 영화 '파리는 안개에 젖어'. 오래된 영화지만, 그 몽환적이고 매혹적인 장면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안개와 어쩌면 닮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갯속을 걷는 지금, 세상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가며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초대했다. 눈 아래, 안갯속, 그 어디쯤에서 나무들은 희미한 그림자로 서 있었고,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내 발밑에서 울리는 눈 밟는 소리뿐이었다. 부드럽게 퍼져 나가는 그 소리는 이 몽환의 세계에서 나를 깨우는 유일한 현실의 신호 같았다.

안개는 모든 것을 흐리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 풍경만은 또렷하게 그려 준다. 걸음을 옮길수록 지나온 시간들이 안개의 베일을 뚫고 떠오르고, 그 기억들이 내 숨결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매 순간 이 아침의 몽환 속에서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 고요한 시간 속에서 오롯이 나 자신을 만나는 듯했다.

안개 너머에서 무언가를 본 듯한 착각, 그러나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이 기분. 그것은 아마도 자연이 주는 작은 마법일 것이다. 이 순간의 몽환을 깊이 음미하며, 나는 오늘 하루를 천천히 시작해 본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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