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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낭만

김왕식






한겨울의 낭만





늦은 밤,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 마음이 설렜다. 아끼는 아우가 부른다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약속된 장소는 깊은 산속, 눈이 쌓인 어느 조용한 숲 속이었다. 그곳엔 이미 몇 명의 벗이 모여 텐트를 치고 장작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겨울 산의 고요를 깨우는 불빛은 마치 오래된 풍경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장작 타는 소리가 아늑한 온기를 더했고,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은 우리는 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눈이 쌓인 대지는 우리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받아주었고, 차가운 공기는 소주 한 잔이 주는 따뜻함을 더 진하게 느끼게 했다. 술잔 속엔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와 함께 녹아든 시간이 담겨 있었다.

7080 음악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옛날 라디오에서 들리던 그 익숙한 멜로디는 우리를 추억 속으로 데려갔다. 젊음이 넘쳤던 날들, 낯선 도전과 아련한 사랑, 그리고 작은 좌절마저도 빛나던 그 시절의 우리. 지금 이 순간, 눈발 섞인 비가 텐트 위로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소리마저 교향악처럼 들렸다. 단순한 빗소리가 아니라 자연과 우리 사이의 교감이었다.

눈앞의 불빛은 작고 초라했지만 마음속의 불꽃은 크고 따뜻했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북쪽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 소리는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 우리를 움찔하게 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낭만의 일부가 되었다. 소리의 경계는 오히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를 더 깊이 느끼게 했다.

그렇게 한겨울의 밤은 깊어갔다. 우리가 함께 만든 이 작은 공간은 자연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불빛과 음악, 웃음소리, 그리고 눈 내리는 숲 속의 고요함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추위 속에서도 우리는 따뜻했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한겨울 밤의 낭만을 만끽하는 이 순간은 아마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곳, 이 시간, 이 사람들과의 추억은 소박하지만 깊고도 값진 선물이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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