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7. 2025
■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없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한강의 '서시'는 삶과 운명, 그리고 그 사이의 인간적인 애틋함과 깨달음을 담은 작품이다. 시는 운명을 의인화하여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삶의 본질과 마주하는 순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시인은 운명을 단순한 개념이 아닌,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존재로 형상화하여 독자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준다. 이 시를 통해 드러나는 한강의 삶의 가치철학과 미의식은 단순한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삶의 복잡성과 그 속에서의 사랑, 후회, 갈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사유와 연민에서 비롯된다.
시의 첫 부분에서 운명은 '나에게 말을 붙이는' 존재로 나타난다. 운명이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물을 때, 화자는 대답 대신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머문다고 한다. 이 장면은 화자가 운명과의 대립보다는 화해와 수용을 선택했음을 상징한다. 운명 앞에서 느끼는 눈물과 고요함, 그리고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삶의 근본적인 순간들을 초월적인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운명에 대해 "당신"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고백의 형태를 띤다.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였다"는 깨달음은 인간 존재의 양가성을 함축한다. 화자는 자신이 운명을 외면하려 하거나 집착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과 연약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이 존재와 시간에 대해 갖는 보편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한강 작가의 문체는 운명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에서 빛난다.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 "콧날의 능선" 등은 운명의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며, 운명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 관찰하고 체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당신의 뺨에 얼룩진"이라는 표현은 운명과 인간 사이에 공유되는 흔적과 감정을 암시하며, 운명을 이해하는 과정이 곧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이 시는 삶의 비극과 아름다움을 대면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 화자는 운명과의 대화를 통해 사랑과 후회, 그리고 집착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이 과정은 자기반성과 더불어 운명을 초월적으로 수용하려는 성찰적 자세를 보여준다. 이는 한강의 문학 세계 전반에 흐르는 ‘상처와 회복, 그리고 연민’이라는 주제와 깊이 연결된다.
한강의 '서시'는 운명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시다. 삶의 복합적인 감정을 수용하려는 자세, 그리고 이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미의식은 독자에게 삶의 본질과 관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한강은 이 시를 통해 운명과 인간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삶의 비극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지혜를 전달한다.
■
한강 작가님께
작가님의 시 '서시'를 읽으며 깊은 감동과 사색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 속에서 운명을 마주하는 장면은 마치 제 삶의 한 순간을 비추는 거울 같았습니다. “운명이 찾아와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라는 대목은 운명을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과정이 담담하고도 따뜻하게 느껴져, 저도 제 운명과 화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는 구절은 저를 한참 동안 멈춰 서게 했습니다. 운명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해 왔음을 깨닫게 해주는 문장이었습니다. 지금껏 제 삶에서 느꼈던 기쁨과 슬픔, 사랑과 후회, 그리고 집착까지도 운명과의 대화 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작가님이 제 마음을 대신 읽어주신 것 같아 깊이 위로받았습니다.
또한, 운명을 묘사한 시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라는 표현은 운명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얼굴은 제 삶의 흔적과도 닮아 있었고, 그것을 마주하는 화자의 고요함이 저에게도 스며들었습니다. 운명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손으로 다가가는 모습에서 작가님의 철학과 삶의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이 시를 통해 제가 느낀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시는 제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제가 걸어온 길을 관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삶과 화해하고 싶다는 작은 용기를 얻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큰 울림을 주신 시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글을 통해 많은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찾는 노정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