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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의 살은 ㅡ 한강

김왕식








어느 날, 나의 살은




한강





어느 날 눈떠보면
물과 같았다가
그다음 날 눈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토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쓴
진통제 *당의糖衣였다가
어느 날 눈떠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오다가


*당의糖衣

당분이 든 막(膜). 정제(錠劑)나
환제(丸劑)따위의 변질을 막고 쉽게 복용할 수 있도록 약의 표면에 입힌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강의 시 '어느 날, 나의 살은'은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생의 다양한 얼굴을 탐구한다. 이 시에서 삶은 물처럼 유동적이기도 하고, 담벼락이나 콘크리트처럼 고정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버려진 누더기와 같은 처참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감정과 경험의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의 초반부에서는 물처럼 부드럽고 흐르는 존재로 시작하지만, 곧 딱딱하고 차가운 담벼락과 내벽으로 변한다. 이러한 묘사는 삶의 변화무쌍함과 고단함을 상징한다. 봄날 먼지 나는 정류장에서의 누추한 모습은 생의 피로와 절망을 표현하며,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날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밤마다의 "거품 뒤집어쓴 진통제 당의"는 고통을 덮는 얇은 위안을 상징하며, 삶의 고통 속에서 억지로 견뎌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물로 돌아가는 모습을 통해 회복과 순환을 암시한다. 삶은 비록 고통스럽고 무거운 순간들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다시 흐르고 회복되어야 할 여지를 가진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강 작가의 이 시는 인간 존재의 깊은 철학적 고민을 담고 있다. 물처럼 흐르고 변하는 삶,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다시 순환하려는 생의 의지는 생명의 본질과 연약함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당의"라는 단어를 통해 삶의 고통을 감싸는 위안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는 작가가 단순히 고통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고통을 견디게 하는 작은 요소들의 가치를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누구나 겪는 일상적 감정과 경험을 섬세하게 형상화하면서도,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어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다양한 모습과 그 뒤에 깃든 희망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며, 한강의 깊이 있는 미의식을 보여준다.







한강 작가님께




작가님의 시 '어느 날, 나의 살은'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시는 마치 내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며, 독자의 내면에 스며드는 강렬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내 삶을 한 단어로 정의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작가님의 시를 통해, 삶은 결코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물처럼 흐르다가도 담벼락처럼 굳어버리고, 누더기처럼 초라하다가도 다시 진통제의 당의처럼 부드럽게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토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라는 구절에서, 저는 스스로의 약하고 무기력했던 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민낯이 이 구절 속에서 투영되었고, 그것이 부끄럽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작가님은 삶의 이런 처절한 순간조차도 시어로 아름답게 승화시키셨습니다.

또한,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오다가"라는 마지막 구절은 큰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모든 고통과 무너짐 속에서도 결국 삶은 다시 흐르고, 우리는 다시금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제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작가님의 시 속에서 저는 생의 다양한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힘을 얻었습니다. 물처럼 흐르고, 때로는 굳어버리며, 다시 부드럽게 회복되는 삶의 순환은, 마치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책망하지 말고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작가님의 따뜻한 응원처럼 다가왔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삶의 이야기와 깊이를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생의 본질을 일깨워주시는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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