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에 묻은 인연, 맑은 하늘에 물들다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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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에 묻은 인연, 맑은 하늘에 물들다
김왕식
비가 갠 오후, 도로 위에는 빗물이 군데군데 고여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도로는 질척였고, 나는 핸들을 조심스레 잡고 운전 중이었다.
순간, 바퀴 아래로 깊게 파인 물웅덩이를 보지 못했다. 차가 빠르게 지나치자 흙탕물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흙탕물은 길가를 걷던 한 여인과 그녀가 안고 있던 작은 강아지에게 그대로 쏟아졌다. 강아지는 깜짝 놀라 작게 낑낑댔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품을 더 꼭 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옅은 베이지색 코트에는 진흙물이 얼룩덜룩하게 번져 있었고, 하얀 강아지의 털에도 흙방울이 흩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람과 당혹스러움이 겹쳐진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브레이크를 급히 밟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처 보지 못했어요.”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조심히 가세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에 담긴 억눌린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미안함이 목덜미까지 차올랐다. 물기 어린 강아지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머릿속에 오래전 지인이 했던 말이 스쳤다. 비슷한 상황에서 흙탕물이 튀어 신고를 당하고 벌금까지 냈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그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지만, 나의 사과 한마디로는 부족해 보였다. 미안함과 안도감이 뒤섞여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며칠 뒤, 동네의 자그마한 카페에 들렀다. 향긋한 커피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창가에 앉아 책을 펼치려던 순간, 문득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의 그녀였다.
연한 니트에 머리를 자연스레 묶은 그녀는 창가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그날 보았던 작은 강아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함이 스며들었지만, 묘한 반가움이 어색함을 덜어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그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순간, 둘 사이에 미세한 공기의 떨림이 지나갔다.
어쩐지 말을 걸기에는 망설여졌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창밖을 보다가 강아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고요하고 따뜻해 보였다.
나는 자리를 정리하며 조심스레 카운터로 향했다.
“저기 창가에 앉아 계신 분 음료, 제가 계산할게요.”
직원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알든 모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하늘이 한없이 푸르고 높아 보였다. 빗물이 모두 씻긴 도로는 말끔했고, 공기는 상쾌했다. 무언가가 가볍게 내려앉은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은 실수에서 시작된 우연한 인연. 그날의 흙탕물처럼 뒤섞였던 미안함과 어색함이 오늘의 맑은 하늘 아래서 조금은 투명해진 듯했다. 따뜻한 커피 향처럼 잔잔하고 부드럽게 마음 한편이 데워졌다.
우연이었지만, 그 만남이 나를 조금 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만 같았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