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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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손수레
"아이고, 김 씨 아저씨. 오늘도 새벽부터 고생이 많으시네요."
시장의 새벽은 어둠과 서늘한 공기를 머금고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시장 입구에서 마주친 이웃이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김 씨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고생은 무신 고생이여유. 삼시세끼 꼬박꼬박 잘 묵고 사는디, 그걸로 됐지유. 또 몸도 좀 놀려야 덜 쑤시고 말이여."
하늘엔 여명黎明이 살며시 번지고, 김 씨의 손수레엔 텃밭에서 갓 따온 깻잎, 상추, 고추, 가지가 싱그러움을 머금은 채 수북이 실려 있었다. 채소에서 풍겨오는 흙냄새와 이슬기는 김 씨의 구수한 말투와 어우러져 새벽 공기를 한층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거 얼마유?"
첫 손님의 목소리에 김 씨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마수걸이라 더욱 정성이 들어갔다.
"깻잎 한 묶음에 이천 원이여."
"아유, 조금만 깎아줘유~"
김 씨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수걸인디, 그건 못 깎아줘유. 근디 이거, 한 움큼 더 얹어줄게유. 덤은 덤이니께."
그의 손길에는 인심이 묻어 있었다. 정직한 땀방울의 가치를 지키는 일, 그것이 김 씨의 고집스러운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 시장이 한산해지면, 김 씨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주머니, 이건 그냥 가져가유. 싱싱허니 아직 괜찮을 거유.
혼자 먹기 힘들믄
주변 사람들과도
나눠 먹는 게 낫지 않겠슈?"
남은 채소들은 주저 없이 이웃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이 김 씨만의 푸짐한 떨이였다.
장사를 마친 김 씨는 다시 손수레에 공병과 폐휴지를 정갈하게 실었다. 시장 구석에 쌓인 병과 종이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발걸음을 고물상으로 옮겼다. 늘 하던 일이지만, 김 씨의 걸음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따랐다.
어느 날, 시장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렸다.
"저 양반, 연금도 받는다던디 뭐 하러 저렇게 고생을 해?"
"그러게. 욕심이 좀 많은 거 아녀?"
아무도 몰랐다. 김 씨가 야채 판 돈과 고물 팔아 모은 돈을 쌀이며 김치로 바꾸어 독거노인들의 문 앞에 조용히 두고 간다는 사실을. 김 씨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한겨울, 옆집 할머니가 말했다.
"밤새 눈이 펑펑 왔는디, 아침에 보니 우리 집 문 앞에 쌀포대가 있더라니께. 누가 놔뒀는지 도무지 모르것어."
"나도유. 김치 한 통이 놓여 있더라니께."
동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김 씨 아저씨가? 그 양반이 왜 그런 걸…"
김 씨는 그저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김씨는 시장 끝자락 허름한 선술집에 발걸음을 멈췄다. 문을 열자 고소한 전 냄새와 함께 익숙한 사람들이 맞아주었다. 김씨는 묵직한 손수레를 한켠에 두고, 나무 탁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여기 탁주 한 사발 줘유. 막걸리 말구, 탁주루다가."
사장님이 쭉 따라준 탁주 한 사발. 김씨는 두 손으로 사발을 감싸 쥐고 천천히 입을 댔다. 걸쭉한 술이 목으로 넘어가자, 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슬며시 풀어졌다. 창밖으로는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시장 골목 사이사이로 스며든 노을빛이 김씨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손수레의 쇠 바퀴에도 주홍빛이 일렁였다.
"아저씨, 오늘은 장사 좀 되셨슈?"
옆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김씨는 사발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글쎄유, 뭐 딱히 잘 팔린 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 얼굴 보고, 말 섞는 것만으로도 고맙지유."
탁주 한 모금이 몸을 데우고, 그 따뜻함이 마음까지 번졌다. 김씨는 술기운에 볼이 붉어졌지만, 그보다 노을빛이 더 깊게 스며든 듯했다. 창밖의 하늘은 어느새 붉은 물결 위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시장의 고요함이 하루를 다독였다.
김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수레의 손잡이를 다시 힘껏 움켜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쇠 바퀴가 돌며 노을빛을 흩뿌리고, 그의 그림자가 시장 골목에 길게 드리워졌다.
"밥 세 끼 잘 챙겨 묵고 사는 것만 해도 충분허지유. 나 혼자 잘 묵고 잘사는 게 무신 소용이겄슈."
그 말처럼, 김씨의 손수레는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따뜻한 마음을 싣고 골목을 누볐다. 붉은 노을 속에 번지는 손수레의 삐걱거림은 마치 세상이 모르는 온정을 담은 낮은 노래처럼 퍼져나갔다.
그렇게 김씨는 어둠이 내려앉은 시장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달빛이 노을을 덮고, 골목마다 스며든 온기가 조용히 퍼져갔다.
세상은 여전히 모르는 따뜻함이, 그렇게 또 한 번 조용히 피어올랐다.
—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