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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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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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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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시 '절정'은 생의 한계와 극한 상황에서의 의지와 철학을 강렬한 이미지와 함축적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살았던 이육사의 삶은 이 시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
시는 개인적 고난을 넘어 시대적 아픔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삶의 가치를 성찰하고 인간 의지의 절정을 드러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이육사는 여기서 역사의 고통과 개인의 고난을 ‘매운 계절’과 ‘채찍’으로 형상화했다. 강제로 북방으로 끌려온 듯한 표현은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는 조선인의 처지를 상징한다. 이 구절은 개인적 고통이 시대적 억압의 연장선에 있음을 암시한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하늘’은 희망과 자유를 상징하지만, 고난의 연속 속에서 그것마저 지쳐버렸음을 말한다. ‘끝난 고원’은 막다른 현실, 혹은 탈출구 없는 공간을 비유한 표현으로, 고립된 존재의식을 드러낸다.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서릿발’과 ‘칼날’은 고통의 날카로움을 극명하게 시각화한 이미지다. 여기에서 화자는 극한의 현실 위에 홀로 서 있으며, 이를 통해 고난과 맞선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이는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상징한다.
“어데다 무릎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화자는 삶의 해답을 찾아 어디에 무릎 꿇어야 할지 고민하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현실을 토로한다. ‘디딜 곳조차 없다’는 절대적인 고립과 무력감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구절은 역설적 표현으로 이 작품의 압권이다. 겨울은 고통의 계절이며, 강철은 차가운 절망이지만 동시에 단단한 의지를 상징한다.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이지만 여기에서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이자, 그 희망이 얼마나 강인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이육사는 절망적 현실을 단순히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견디며 삶의 본질을 직시하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준다.
시는 단순히 개인적 감정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적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을 드러낸다.
특히, 날카롭고 생생한 이미지들을 통해 고난과 의지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서릿발’, ‘칼날’, ‘강철’ 같은 표현은 차가운 고통을 생생히 전달하며, 동시에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절정'은 이육사의 삶과 철학이 응축된 시로, 고통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의지와 희망을 강렬한 시어로 형상화했다. 그는 단순한 저항 시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삶의 본질과 인간의 존엄을 탐구한 철학적 시인이었다.
이 시는 개인적 고뇌를 넘어 민족의 고난을 품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차가운 언어 속에서 단단한 의지가 빛나는 이 시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인간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과 의지를 상징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