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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의 가스라이팅

김왕식








예술과 사회의 가스라이팅





문학평론가 김왕식






거대한 흰 캔버스 한가운데 먹점 하나.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점 하나일 뿐인 이 작업이, 유명 화가의 손을 거치면 예술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 뒤를 잇는 것은 거대 미술평론가들의 찬사다.

“여백의 미로 표상된 우주의 허적虛寂”

고상한 수식어는, 처음에는 낯설고 차가운 눈길로 그림을 바라보던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관람객들은 미처 깨닫지 못한 '깊은 의미'를 찾으려 애쓰며, 점 하나를 보며 자신의 무지함을 탓하기 시작한다. 결국, 모두가 동의한다.

“이건 명화다.”

그렇게 그림은 고상한 예술로 둔갑하고, 억대를 넘나드는 값어치를 자랑하게 된다.

이 점 하나는 정말로 그런 거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까? 혹은, 유명 화가의 이름과 평론가의 말솜씨가 점 하나에 담기지 않았던 의미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같은 점을 어린아이가 흉내 낸다면 어떨까? 아무도 그것을 “우주의 허적”이라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엄마는 “아까운 캔버스를 망쳤다”며 꾸짖는다. 아이는 자신이 그린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눈물로 응답한다. 어른들 눈에 점 하나의 의미는 아이가 찍었을 때와 유명 화가가 찍었을 때 극명히 달라진다. 그 차이는 점의 예술적 완성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명성,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

이는 단지 미술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특정 작가가 평론가의 극찬을 받으면 그 작품은 '혁신적'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반대로 이름 없는 이의 창작물은 아무리 혁신적이어도 주목받지 못한다. 이름과 권력, 그리고 이를 둘러싼 네트워크는 작품의 실제 가치와는 무관하게 예술의 '진정성'을 결정짓는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점점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작품을 보고 느끼기보다, 평론가와 전문가들이 제시한 '감상의 틀'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다. 관객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해석해 주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며, 예술 작품을 스스로 해석할 기회를 잃는다. 결국, 예술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언어로만 정의되고, 대중은 그 언어를 암기하며 예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멀어진다.

이러한 풍경은 사회 전반에 걸쳐 동일한 권력 구조가 반복된다.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특정 권력을 가진 소수는 자신들의 언어로 대중을 지배한다. 한 가지 주장을 극찬하거나, 특정 사상을 중심으로 대중을 끌어모으며, 이에 반대되는 생각은 배제한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진리가 되고, 대중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정보의 편중은 이러한 구조를 더욱 강화시킨다. 미디어는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왜곡하거나 과장한다. 대중은 거짓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잃는다. 개인의 자율적 판단은 무력해지고, 집단의 판단에 휩쓸려 간다. 이는 예술의 영역에서 시작된 문제 같지만, 실상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 구조가 초래한 결과물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되는 이유는 대중이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고 권력자들의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이 예술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이건 명화다”라는 외부의 평가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작품을 보고 느낀 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회적 권력에 휘둘리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권력과 언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 역시 필수적이다. 어떤 평론이나 주장도 특정 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 언어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와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는 단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예술과 자유로운 사회는 특정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흰 캔버스에 찍힌 먹점 하나를 단지 '점'으로 보지 않고, 거기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찾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스라이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쭙잖게 문학을 평석하는

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적잖이 불편하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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