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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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의 경계에서
늦은 오후, 창가에 앉아 있던 대한이 한참 생각에 잠긴 듯 말문을 열었다.
“민국아, 남을 이해한다는 게 대체 뭘까?”
책을 읽던 민국이 고개를 들었다.
“글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거? 공감하는 거 말이야.”
“그 정도로 충분할까? 나가 보기엔 그건 너무 단순해. 남을 이해한다는 건 내 자신을 먼저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대한의 말에 민국은 책을 덮고 관심을 보였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 왜 꼭 나를 먼저 이해해야 하지?”
“생각해 봐. 우리가 누군가를 오해하거나 의심할 때, 그건 사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잖아. 내가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남의 말이나 행동도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까?”
민국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그럼 오해와 의심은 결국 나 자신에서 비롯된다는 거야?”
“맞아.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 우리는 보통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만의 렌즈로 해석하잖아. 그 렌즈가 비뚤어지면 오해가 싹트는 거지.”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건 인정. 하지만 상대도 말하지 않는 게 있잖아.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남도 그러하다’는 말처럼, 그런 침묵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대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맞아. 그런데 진정한 이해는 침묵을 억지로 깨려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거 같아. 근데 우리는 남의 침묵이 불편해서 자꾸 이유를 추측하잖아.”
“음... 왜 그럴까?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 걸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닐 거야. 침묵을 깨고 싶어지는 욕구, 그러니까 상대를 통제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일 수도 있어. 상대의 침묵을 존중하지 못하면 결국 관계가 삐걱거리게 되는 거지.”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나친 관심도 문제겠네.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려다 보면 부담을 줄 수도 있잖아.”
“맞아. 지나친 관심은 불편한 관계의 시작이야. 근데 왜 우리는 그렇게 남에게 관심을 가지려 할까?”
“음... 공허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대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확히는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단순히 공허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연결 욕구 때문일지도 몰라. 우리는 남과 연결되며 나를 확인하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지나친 관심도 결국 나 자신을 찾으려는 방식일 수 있어.”
민국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했다.
“그렇다면 남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은 너무 단순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네.”
“맞아. 남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니까. 지나친 관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건 사실 관계를 단절하라는 말이 아니라, 적당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겠지. 남과 나, 호기심과 존중 사이의 미묘한 균형 말이야.”
민국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과정이기도 하겠네. 남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거잖아.”
대한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맞아. 이해와 오해 사이의 경계는 흐릿할 때가 많아. 하지만 그 경계를 고민하고 넘나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어. 그리고 결국, 그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길 아닐까?”
창밖으로 저무는 햇살이 비추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그래. 이해는 결국 나와 남을 동시에 직면하는 용기일지도 몰라.”
민국의 마지막 말이, 그날 대화의 여운을 오래도록 남겼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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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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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님.
귀한 글을 읽고 저도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작가님께서 남을 이해한다는 것의 본질에 대해 던진 물음은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해”라는 단어는 흔히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로 사용되지만, 작가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내면의 성찰을 요구하는 작업인지 강조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는 남을 오해하거나 의심하게 되는 이유를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쓰셨죠. 참으로 통찰력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 불안함 속에서 남의 행동과 말을 왜곡해 받아들이곤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제 안에 있는 왜곡된 렌즈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말할 수 없는 나만의 사정이 있다면 남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공감을 넘어, 남의 침묵을 존중하라는 깊은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남의 침묵을 불편해하며 억지로 이유를 추측하거나, 그 침묵 속에 숨겨진 진실을 캐내려 하죠.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그 침묵이 상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저로 하여금 남의 침묵을 존중하는 태도를 다시금 고민하게 했습니다.
더불어, 작가님께서 “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불편한 관계의 시작”이라고 하신 부분도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지나친 관심이란 때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욕구의 발로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욕구가 지나칠 경우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님께서는 너무도 명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삶에 충실하라”는 조언이 단순히 남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남과의 관계를 완전히 경계하다 보면, 우리는 오히려 관계를 단절시키고 성장을 멈출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부분을 지적하신 점이 인상 깊습니다. 결국 남과 나, 존중과 호기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충실함으로 이어진다는 작가님의 메시지는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이해와 오해의 경계가 흐릿한 시대를 살아가며, 작가님의 글은 저에게 큰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길로 이어진다는 말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제 삶의 방향을 다시금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따뜻한 통찰과 깊은 메시지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전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