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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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진풍경
명절이 가까워지면 시골 마을은 분주해진다. 산과 들이 모두 얼어붙은 겨울에도, 마당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가마솥의 김이 피어오른다. 명절 준비의 첫 단계는 다름 아닌 ‘목욕’이다.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일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의식 같은 일이었다.
큰 고무대야는 마당 한가운데 놓인다.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워 끓이고, 땀 흘리며 장작을 던져 넣는다. 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대야에 붓고, 찬물을 섞어 적당한 온도를 맞춘다. 그리고 가족들이 차례로 대야 안으로 들어간다.
“큰아들부터 들어가라.”
“왜 맨날 나부 터어요? 동생부터 하면 안 돼요?”
“네가 제일 크니까 물 덜 더럽힐 때 빨리 들어가야지.”
큰아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대야에 들어간다. 물이 뜨겁다며 몸을 웅크리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박 밀기 시작한다. “엄마, 살살 좀요!” 하소연도 잠시, 몸 구석구석 밀려 나온 때가 대야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큰아들이 빠져나오자 동생들이 외친다.
“엄마, 저 물에 어떻게 들어가요? 더럽잖아요!”
“걱정 마라, 걷어내면 돼.”
엄마는 대야로 물 위에 떠 있는 때를 퍼낸다. “자, 깨끗하지?” 물은 여전히 미지근하고 어딘가 찝찝하지만, 동생들은 순서대로 들어가 몸을 담근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막내는 미적지근한 물속에서 소리친다.
“엄마, 이거 물 아니고 진국이야! 육수 같아!”
가족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그 물은 마지막에 빨래물로 쓰이고, 다 쓰고 난 물은 먼지를 잠재우기 위해 마당에 뿌려진다. 물 한 방울까지도 버릴 수 없는 시절이었다.
조금 형편이 나은 집 아이들은 공중목욕탕으로 간다. 그곳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물망으로 둥둥 떠다니는 때를 걷어내고, 그 물에서 다시 목욕을 한다.
그 시절, 목욕은 몸을 씻는 일 이상의 의미였다. 모두가 추운 겨울을 함께 견디며 명절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고무대야 속에 떠다니던 때마저도 서로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그것은 가족의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는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가마솥 대신 보일러가, 고무대야 대신 욕조가, 공중목욕탕 대신 개인 욕실이 자리 잡았다. 따뜻한 물은 언제든 손쉽게 틀 수 있고, 때를 걷어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 대야 물 위를 떠다니던 때가 여전히 떠오른다. 불편하고 번거로웠지만, 그 속에는 가족의 웃음과 정이 담겨 있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릴 적 그 물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지금은 그 때를 걷어내던 바가지도, 마당의 고무대야도 없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물 위에 떠다니는 가족의 기억이 둥둥 떠다닌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