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투명한 시간의 경계에서
장상철 화백
하얀 눈은
이 세상의
모든 색을 하얗게
그려낼 수 있다.
하얀색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색은
투명한 색이다.
뿌리가 같은
하얀색과 투명색은
서로 다르지
않음으로
별에서 내려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눈 내리고
찬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창을 두드리는 날이면
숲 속 새들의 안위安危에
마음 쓰인다.
큰 새의 품에 있을
작은 새들은
이런 낯선 상황에 익숙하지
않을 터이니,
작은 몸을 날개로
감싼 채
더욱 움츠리고
있을 듯하다.
눈 내리는 밤은
별을 헤는 밤보다
몇 곱절은
더 가슴 조리며 새벽을 기다린다.
따스한 햇빛만이
이 모든 상황을
평안한 현상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침묵을 흔드는
허공의 초침 소리를
귀하게 들으며,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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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철 화백이 새해 아침에 남긴 이 글은 단순한 겨울 풍경을 넘어, 생명의 근원과 순환을 사색하며 고요한 투병의 시간을 담아낸 깊이 있는 단상이다. 자연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찾고, 색채를 매개로 하여 삶과 예술의 근원을 성찰하는 그의 시선은 마치 투명한 얼음판 위에 새겨진 섬세한 붓 자국처럼 정제된 미의식을 반영한다.
글의 초반에서 눈과 투명색의 관계를 통해 그는 존재의 순수성과 근원에 대한 철학을 탐색한다. 하얀 눈은 모든 색을 덮을 수 있지만, 유일하게 투명색만이 그것을 지울 수 있다. 이는 장 화백이 지향하는 미적 가치와도 연결된다.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색감,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표현 방식은 투명색처럼 본질에 가까운 미학을 추구하는 태도와 맥락을 같이한다. 하얀색과 투명색이 ‘뿌리가 같음’에도 ‘서로 다르지 않음’으로 인해 ‘별에서 내려왔다’는 해석은, 인간과 자연, 예술과 존재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원천으로 회귀하는 장 화백의 사유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단순한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숲 속의 작은 새들에게까지 시선을 확장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연민과 생명 존중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큰 새의 품에 있을 작은 새들’이 낯선 상황에서 움츠려 있는 모습은, 아마도 스스로를 자연 속의 작은 생명체로 바라보는 화백의 내면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투병의 시간을 견디며 느끼는 불안과 고요한 기다림이 이 장면 속에 은유적으로 담겨 있다. 그의 미의식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삶과 죽음, 보호와 위안의 관계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눈 내리는 밤은 별을 헤는 밤보다 몇 곱절은 더 가슴 조리며 새벽을 기다린다’는 문장은 그의 내면 풍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 즉 투병의 시간 속에서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를 담아낸다. ‘따스한 햇빛만이 이 모든 상황을 평안한 현상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다’는 표현은,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장 화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에게 빛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균형을 회복하고 생명을 지탱하는 근원적 요소이며, 이는 그의 그림에서도 드러나는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그는 ‘침묵을 흔드는 허공의 초침소리를 귀하게 들으며,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사유를 넘어, 시간과 존재의 경계를 초월하려는 예술가의 정신성을 담고 있다. 병상에서 맞이한 새해 아침, 그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소멸이 아니라 초월을 바라본다. 이는 단순한 인내와 기다림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을 관통하려는 장 화백만의 미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장상철 화백의 이 글은 단순한 겨울의 기록이 아니다. 이는 그의 삶과 예술, 투병의 시간을 초월하는 깊은 사유가 담긴 철학적 산문이다. 하얀색과 투명색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고, 작은 새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생명의 본질을 되새긴다. 또한 눈 내리는 밤을 지나 새벽을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시간과 빛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내고, 결국에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가적 태도로 글을 마무리한다.
그의 회화처럼 이 글에서도 절제와 여백의 미가 살아 있으며, 자연과 색채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투명한 빛 속에서 존재를 성찰하는 장 화백의 시선은, 그의 삶과 작품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하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