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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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봄
시인 임보선
삶이 허전할 때
삶이 버거울 때
나는 헤맸다
불어오는 바람 앞에
차마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천지사방 둘러봐도
기댈 곳 하나 없는
어리석고 무력한 절벽 끝에서
외롭다 그립다
허영이고 사치일 뿐
기적도 한바탕 야단치고 돌아갔다
목이 쉬도록 울었지만
눈물 닦아줄 이도
같이 울어줄 이도
파고들 가슴 하나 없는
현실은 12월
흔들리고
쓰러지고
무너지고 일어서는데
콘크리트 바닥
전신주 기둥 틈새
바늘 같은 풀꽃 하나
실 같은 소리로
봄이 오는 중이라고
13월의 봄이!
13월의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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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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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선 시인의 13월의 봄은 사랑에 대한 깊은 상실감과 절망을 넘어, 그럼에도 다시 찾아오는 희망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시는 단순한 이별의 아픔을 넘어, 삶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상실의 순간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희망의 가능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시의 초반부는 삶이 버겁고 허전할 때, 시적 화자가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다. "불어오는 바람 앞에 / 차마 입 한 번 떼지 못하고"라는 구절은 내면의 고통을 외면당한 채 속으로 삭이는 모습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현실 앞에서, 위로받을 곳조차 없는 절벽 끝에서의 무력감은 더욱 강한 절망을 강조한다. 이러한 절망의 정서는 “외롭다 그립다 / 허영이고 사치일 뿐”이라는 단호한 단절로 표출된다. 사랑의 부재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그리움조차도 사치로 여겨질 만큼 현실은 가혹하다.
시인은 "기적도 한바탕 야단치고 돌아갔다"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기적마저도 자신을 외면했다고 토로한다. 이는 마치 신마저 자신을 버렸다는 비극적 인식으로 읽힌다. "목이 쉬도록 울었지만"이라는 문장에서 화자의 절규는 극한으로 치닫고, "눈물 닦아줄 이도 / 같이 울어줄 이도"라는 대목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이 드러난다.
결국 시적 화자가 서 있는 곳은 "현실은 12월"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이는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혹독한 겨울, 사랑이 떠나버린 빈자리를 의미한다.
허나, 이 시의 미학은 단순한 절망의 토로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의 후반부에서, "콘크리트 바닥 / 전신주 기둥 틈새 / 바늘 같은 풀꽃 하나"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생명을 틔우는 작은 존재를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히 "실 같은 소리로"라는 구절은 희망이 거창한 외침이 아니라, 아주 미미한 속삭임처럼 찾아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봄이 오는 중이라고 / 13월의 봄이! / 13월의 봄이!."라는 결구는 이 시의 백미다. 존재하지 않는 13월을 설정함으로써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반드시 새로운 계절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13월은 현실의 시간 개념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시인의 고통과 희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결국 이 시는 절망을 끝없는 겨울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희망일지라도 끝끝내 기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임보선 시인의 13월의 봄은 단순한 상실의 기록이 아니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절망의 무게를 철저히 응시하면서도, 시인은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절망을 절제하면서도, 시적 긴장을 유지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 이 시의 품격을 높인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아픔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을 통해 경험하는 보편적 아픔이자 극복의 과정이다. 존재하지 않는 13월의 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삶을 바라보는 가치철학이자 이 시가 담고 있는 미의식이라 할 수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