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이상의 권태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
권태로워
하품만 하다가
이내
책을 떨어뜨리고
잔단다.
■
권태의 얼굴들
ㅡ이상의 ‘권태’와 세계 문학의 대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상의 수필 ‘권태’는 제목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에 묘한 파장을 일으킨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무료함과 지루함. 하지만 이 글 속의 ‘권태’는 일상의 피로감을 넘어,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상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 느껴지는 무력함을 담담하게 그리면서도, 그 안에 숨은 아이러니와 유머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권태라는 감정을 무겁게 끌어안기보다는, 마치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이상의 시선은 독특하다. 그는 일상의 권태를 문학적 감각으로 해석하면서, 독자에게 단순한 공감 이상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권태’라는 주제는 과연 이상만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사례들이 있었을까? 이 질문을 따라, 우리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하라 다미키의 ‘인간실격’이라는 두 작품으로 눈을 돌려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권태와 무의미함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탐구하면서, 이상의 ‘권태’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권태의 담담함
ㅡ이상의 시선
이상의 ‘권태’는 일상에서 느끼는 무력함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지루함이 스며드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마치 일기처럼 풀어낸다. 그러나 그 문장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상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독창적인 리듬은 독자에게 지루함조차 새로운 감정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상은 권태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감정을 관찰하고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점에서 ‘권태’는 독자에게 일상의 무료함을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상은 권태를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삶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어쩌면 우리는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한 권태
ㅡ 카뮈의 ‘이방인’
반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권태와 삶의 무의미함을 훨씬 더 냉소적이고 냉담하게 다룬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슬픔을 느끼지 않고, 일상의 사건들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태양이 뜨거웠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고, 재판을 받으면서조차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카뮈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이상이 그려낸 ‘권태’의 주인공과 닮아 있다. 그러나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상은 권태를 유머와 아이러니로 풀어내지만, 카뮈는 그것을 부조리한 삶의 본질로 직시한다. 뫼르소에게 권태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삶 자체의 무의미함을 상징한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이방인’은 이상의 ‘권태’와 다른 결을 가진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권태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깊이를 공유한다. 이상이 권태 속에서 유머와 사색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카뮈는 그 속에서 부조리와 자유를 발견한다.
절망의 끝
ㅡ하라 다미키의 ‘인간실격’
이제 권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하라 다미키의 ‘인간실격’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이상의 ‘권태’나 카뮈의 ‘이방인’보다 더 파괴적인 결말로 향한다. 주인공 요조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점점 자기 파괴적인 삶으로 빠져든다. 그는 권태와 무의미함을 넘어, 완전한 절망에 이른다.
‘인간실격’에서 권태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인간이 겪는 궁극적 소외와 자기부정의 상징이다. 요조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그 권태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작품은 이상의 *‘권태’*가 보여주는 유머러스한 여백이나, 카뮈가 제시하는 부조리한 자유의 가능성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상과 하라 다미키를 비교하면, 권태를 바라보는 극명한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이상은 권태 속에서 삶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고, 카뮈는 그 권태를 인정하면서도 자유의 가능성을 남긴다. 그러나 하라 다미키는 권태의 끝에 절망과 소멸만을 남긴다.
권태, 삶의 또 다른 이름
이상의 ‘권태’,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하라 다미키의 ‘인간실격’은 모두 권태라는 감정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서로 다른 결말로 나아간다. 이상은 권태를 통해 삶의 아이러니와 사색의 기회를 발견하고, 카뮈는 그것을 부조리한 자유로 승화한다. 반면 하라 다미키는 권태의 끝에서 자기 파괴와 절망을 보여준다.
이 세 작품은 권태라는 감정을 단순히 지루함의 문제가 아닌,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으로 끌어올린다. 이들의 차이는 곧, 우리가 권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이상의 ‘권태’는 그중에서도 독자에게 가장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던진다. 권태로운 일상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이상처럼 그것을 삶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요컨대, ‘권태’는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우리 삶의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이상의 글을 읽고 나면, 어쩌면 우리는 권태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삶의 지루함조차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이상이 ‘권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