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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부정한 인생, 곧은 마음

김왕식







꾸부정한 인생, 곧은 마음





한때 푸르른 빛을 머금고 하늘을 찔렀을 청솔나무들이, 이제는 어깨를 구부린 채 서 있다. 저 나무들에게도 찬란했던 유년이 있었으리라.
“달삼이, 저 청솔나무 좀 봐라. 한때는 하늘 끝까지 찌를 기세였을 거 아녀?” 길근이가 말했다.
달삼이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근디 세월이란 게 무섭긴 허지. 바람 불고, 눈 오고, 비 맞고 하다 보면 저렇게 꾸부정허니 서는 거여.”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그런 나무들을 바라보며 달삼이는 문득 공원의 낙엽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낙엽을 시들고 떨어진 것이라 여기겠지만, 달삼이는 오히려 일찍이 구부러진 그 낙엽들이 좋았다.

“길근아, 나는 저 낙엽들이 좋다. 그냥 떨어진 게 아니잖여. 다 때가 되어서, 구부러질 때 구부러지는 거지.”
길근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어, 달삼이. 구부러짐 속에 다 사연이 있는 거여.”
구부러진 식물들은 마치 윤회輪廻의 이치를 닮아 있다. 시작과 끝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환, 그리고 그 안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변화의 흐름. 강물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도 쉼 없이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는 물줄기. 때로는 그 속도가 무서울 만큼 빠르게 느껴진다.
“강물 좀 봐, 달삼아. 저렇게 쉼 없이 흘러가는디, 우리 사는 것도 저랑 똑같지 않겄냐?” 길근이가 말했다.
달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길근아. 사는 것도 그냥 떠밀려 가는 거여. 근디 말여, 저 물살 속에서도 풀꽃들은 달빛 잡으려고 몸을 구부린다니께.”
길근이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참, 너도 별 걸 다 본다야. 근디 맞는 말이여. 구부러져도 빛을 향한 맘은 안 꺾이는 거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달삼이는 세상의 직선들이 주는 괴로움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곧게, 똑바로, 효율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들. 세상은 자꾸만 우리에게 똑바로 서라고, 구부러지지 말라고 강요한다.
“길근아, 사람들은 맨날 똑바로 살아라, 곧게 서라 그러잖여. 근디 말이여, 사람이 어떻게 맨날 똑바로만 서서 살겄냐?”
길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여. 등을 구부린 과일이 더 달고, 구부정한 노인네가 더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디 말여.”
달삼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허리가 구부러진 황소도 평생 밭 갈고 묵묵히 살았는디, 그 구부러짐이 뭐가 나쁘겠냐.”

문득 달삼이는 생각했다. 하루라는 시간도 어쩌면 구부러짐의 시작과 끝을 품고 있는 둥근 공과 같지 않을까.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새로운 각오로 곧게 서지만,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점점 지치고 구부러진다.
“길근아, 아침엔 똑바로 허리 펴고 일어나도, 저녁만 되면 다들 꾸부정허니 지쳐있잖여.”
길근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어, 근디 또 내일 되면 다시 일어나잖여. 풀도 구부러졌다가 바로 서고, 다시 구부러졌다가 또 일어서는 거지.”
달삼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 풀들의 유연성이 바로 사는 거여.”

흐르는 강물의 곡선, 산길의 굽이굽이 이어진 길,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모든 길들이 구부러져 있다. 사랑 역시 그렇다. 한 사람에게만 마음이 휘어진 여자처럼,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마음을 구부리며 살아간다.
“달삼아, 너도 사랑할 때 마음 한번 휘어봤잖여.”
달삼이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길근아. 누군가한테 마음 한 번 휘어주는 거, 그게 사는 맛 아니겄냐?”
길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디 그게 굽실거림으로 보일 때가 문제여. 그때는 참 답답혀.”

달삼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맞어, 구부러진다고 약한 건 아닌디,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만 보니까 숨 쉬기 힘들어지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삼이는 겨울바람에 구부러지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나무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구부러짐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차가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곧게 서는 나무들.
“길근아, 나는 그런 나무들이 좋다니께. 구부러지다가도 딱 다시 일어서는 거, 그게 희망 아녀?”
길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어, 달삼아. 구부러지는 건 포기가 아닌 거여. 잠깐 쉬는 거지.”

세상에는 구부러지다가도 "도저히 안 되겠다"며 다시 일어서는 것들이 너무나 적다. 대부분은 한 번 구부러지면 영영 그 자세를 유지하거나, 아예 꺾여버리고 만다.
“달삼아, 세상 사람들 중에 다시 일어서는 사람, 참 드물어. 한 번 꺾이면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거여.”
달삼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되는 거여. 구부러지면서도 꺾이지 않는 거, 그게 진짜 멋있는 거지.”

구부러진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구부러짐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찾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다.
“길근아, 꾸부정허니 살다가도 어느 순간 딱 허리 펴는 날이 오는 거여. 그때까지 버티는 게 사는 거지.”
오늘도 달삼이는 길근이와 함께 세상 곳곳에서 구부러지다 다시 일어서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함께 삶의 곡선을 그려 나갔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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