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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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청람루의 노래
장심리 깊은 산골, 청람루라 불리는 허름한 농막 앞마당에 길근이는 멍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며 산자락에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꾀꼬리 소리가 푸른 숲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길근이는 빈 막걸리병을 옆에 두고, 손때 묻은 통기타를 툭툭 두드리며 먼지를 털었다.
그때 달삼이가 산길을 타고 느릿느릿 올라왔다. 도시 티가 아직 다 빠지지 않은 구두에 먼지를 잔뜩 묻히고서.
"야, 길근아! 아직도 이 청람루에서 혼자 삽니더?" 달삼이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길근이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니 기다리고 있었지. 그라믄 혼자가 아니제."
달삼이가 숨을 고르며 농막 앞에 섰다. "이런 데서 사는 니 보면 참 대단하다. 서울 살다 오니, 이 산골 공기부터 다르다 그라."
길근이는 막걸리잔을 하나 더 꺼내 달삼이 앞에 놓았다. "공기가 좋은 게 아니라, 사람이 많지 않은 기라. 이래 조용한 게 딱이다."
달삼이는 잔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향 내려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작년 추석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길근이는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이 술잔이 그냥 술잔이 아이다. 오늘 밤, 제대로 뿌셔야제!"
두 사람은 막걸리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석양을 등진 산복숭아나무가 저물어 가는 빛 속에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뭇잎 틈새로 몇 송이 꽃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저 꽃 봐라. 아직도 버티고 있네. 봄 끝자락 붙잡고 있는 기라." 달삼이가 나무를 가리켰다.
길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우리 같네. 도시서 버티는 니나, 산골서 버티는 나나."
소나무숲에서 내려온 바람이 두 사람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달삼이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이 바람, 참 좋다. 서울서는 이런 거 못 느낀다 아이가." 달삼이가 두 눈을 감았다.
"그러쿠말이다. 여긴 시간도 천천히 간다. 니도 좀 자주 내려와라." 길근이가 잔을 채우며 말했다.
상현달이 앞산 봉우리를 넘으며 은은한 달빛이 청람루를 비췄다. 달삼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달빛 참 곱다. 감꽃도 실눈 뜨고 있을 끼다."
길근이는 통기타를 손에 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부엉이 불러서 기타 좀 치라 하고, 소쩍새도 불러서 노래 시키자."
달삼이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탁란도 끝났으니 뻐꾸기한테도 연락하자. 걔도 술 한잔 해야제."
그렇게 두 사람은 청람루에 모인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돌리며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막걸리병은 점점 줄어들고, 웃음소리가 산속을 가득 채웠다.
"야, 달삼아. 니 시 한 수 읊어봐라." 길근이가 말했다.
달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봄은 가고, 꽃은 지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리움 한 잔, 추억 두 잔
달빛 아래 흥에 젖는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이내 친구들은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산속 어딘가로 스며들어갔다. 달빛 아래 청람루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술잔은 계속 돌았고, 흥겨운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달삼이는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길근아, 니 이래 좋을 때마다 생각난다. 고향 떠나 살면서 이런 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길근이는 달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도 니는 돌아올 고향이 있잖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술 한잔 기울일 자리도 있고."
달삼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바람은 다시 불어왔고, 멀리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서서히 잦아들고, 청람루는 다시 고요에 잠겼다.
그날 밤, 길근이와 달삼이, 그리고 친구들은 봄의 끝자락을 붙잡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달빛은 여전히 밝았고, 숲속의 모든 것들이 그들을 지켜보는 듯했다.
그 자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무언가로 남았다.
그 밤의 달빛 아래서 나눈 이야기와 웃음이, 언제 다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