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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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속삭임, 취기의 유혹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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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술이면서 술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한 겹의 시간이 담긴 액체이며, 한 잔의 깊이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포도라는 작은 열매가 햇살과 바람, 땅의 기억을 머금고 발효를 거쳐 와인이 되기까지, 그것은 한 편의 서사이고, 긴 기다림이며, 인내의 결정체다.
술이라면 응당 들이켜는 순간 그 본성을 드러내야 한다. 도수가 높다면 불처럼 목을 태우고, 도수가 낮다면 목젖을 간질이며 장난을 걸어야 한다. 와인은 다르다. 그것은 한 모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외려 가만히 숨어 있다. 마치 오랜 연인이 손끝으로 스치듯 은은하게,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잔을 기울일 때, 우리는 그 향을 먼저 맞이한다. 싱그러운 과일 향, 바람이 머문 숲의 향기, 시간을 머금은 오크통의 깊은 여운. 향만으로도 이미 반쯤 취한 것처럼, 기분이 몽롱해진다.
첫 모금은 부드럽다. 자극이 없다. 혀끝에서 미끄러지는 촉감은 온화하며, 쓴맛과 단맛, 산미와 떫은맛이 오묘하게 얽힌다.
그 모든 것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 강렬하지 않다. 그래서 위험하다. 경계심을 허물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소 의아했다.
술을 마셨는데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그렇다면 한 잔 더, 그리고 또 한 잔. 천천히 스며드는 이 유혹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사람들은 잊어버린다. 지금 자신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몇 잔이 오가고 나서야, 취기가 문득 찾아온다. 불쑥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감각. 무게가 사라진 듯한 가벼움.
그것은 취기가 아니라, 취기가 시작될 것을 알리는 전조에 불과하다. 이제 막, 와인이 본색을 드러내려 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의자도 먼 곳에 있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는 자신이 의도한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균형을 잡으려 애쓰지만, 이미 와인은 육체의 통제권을 가져가 버렸다.
그제야 깨닫는다.
"이 술이야말로, 진짜 술이다."
소주는 투박하다. 그 강렬함으로 존재를 과시하며,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낸다. 맥주는 유쾌하다. 거품을 일으키며 가볍게 기분을 띄운다. 와인은 우아하다.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를 포섭한다. 어느 순간, 그것이 심연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와인은 마시는 술이 아니라, 스며드는 술이다.
귀에 속삭인다.
"괜찮아. 한 잔 더 해도 돼."
부드럽게, 달콤하게, 나른하게. 마치 사랑의 유혹처럼, 그것은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그것이 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이미 잔을 기울이고 있고, 이미 취한 상태이다.
묘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주를 마신 뒤엔 속이 쓰리고, 맥주를 마신 뒤엔 배가 부르다.
와인은, 마신 후에도 아름답다. 그것이 남기는 취기는 거칠지 않고, 온화하다. 머릿속이 둥둥 떠다녀도 불쾌하지 않다. 외려 기분 좋은 몽롱함 속에서, 잊고 있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사랑했던 순간들이 지나가고,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 한 구절이 귓가에 맴돈다.
그렇게, 와인은 우리를 시(詩)의 공간으로 이끈다.
우리는 결국, 또다시 그 속삭임에 속아 넘어간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