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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 사발과 마지막 내일

김왕식








막걸리 한 사발과 마지막 내일







"야, 인생이 뭐라 생각하노?"

"글쎄, 살아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살아봐도 모를 수 있는 기라. 살아도 끝까지 다 모른다 아이가."

늙은 영감이 막걸리 사발을 비우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젊은 사내는 마른 손으로 장작을 집어 화롯불에 던지며 말을 걸었다.

"영감님, 뭔 일이십니까? 오늘따라 왠지 철학적인데요?"

"내가 말이다,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기막힌 이야기요?"

"그래, 영국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이름도 잘 모를 사람이다. 무슨 큰 상을 받은 작가도 아니고, 유명한 배우도 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여자 글을 보고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카더라."

"도대체 무슨 글이길래 그렇습니까?"

영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샬롯 키틀리라고 했다. 젊은 나이에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데이. 그리 심한 병이면 사람 미쳐버리지 않겠나. 온갖 치료를 다 해봤다 카더라. 수술 두 번, 방사선 치료 25번, 화학 치료 39번.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써서 먹기 힘든 즙도 마셔보고, 한약방 찾아가 침도 맞아봤지. 살고 싶어서,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까지 했으면 살았어야지요…"

"안 됐지. 결국 떠나야 할 시간이 온 거라. 근데 죽음을 앞두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참말로 기가 막혔다."

젊은 사내는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이렇게도 살고 싶은데, 시간은 나한테 허락하지 않는다.’"

사내의 손이 떨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이 스쳐 지나갔다.

"서둘러라! 빨리 밥 먹고 학교 가라!"

그저 일상이라 여겼던 순간들이, 사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몰랐다. 아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다.

"그 여자가 그랬다 카더라. 아이들한테 소리치던 나날도, 남편한테 못된 마누라로 늙어가는 것도 다 행복이더라고. 하루하루가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고. 근데 말이다, 그거 깨닫고 나니까 시간이 없다 아이가."

영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늘 오늘이 당연한 줄 알고 산다. 근데 말이다, 어제 죽어간 사람들한테 오늘은 어떤 날인 줄 아나?"

젊은 사내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사람들한테 오늘은, 그렇게도 살아보고 싶었던 ‘내일’이었다."

"영감님, 그러면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거야 단순하지. 오늘 하루를 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기라."

"아, 그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쉬운 일 아니다. 하지만 말이다, 스펜서 존슨이라는 사람이 그랬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오늘’이라고. 사람들은 과거에 매달려 원망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오늘은 허투루 흘려보낸다. 근데 말이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장 큰 선물이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다. 과거에 대한 원망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다 내려놓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근데 말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줄 아나?"

"왜 그렇습니까?"

"그거야, 아직도 자기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내는 조용히 막걸리 잔을 내려놓았다.

"영감님 말씀을 듣고 나니, 뭔가 후회되는 게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내일이 있다고 믿으니까, 오늘을 그냥 흘려보내는 기라. 근데 말이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지막 ‘오늘’을 맞이하고 있다."

젊은 사내는 갑자기 일어났다.

"어디 가노?"

"집에 갑니다."

"이 밤중에?"

"예, 늦기 전에요."

"늦기 전에라…"

영감은 사내가 사라진 어두운 길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막걸리를 들이켰다.



삶은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

허나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는 경우가 많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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