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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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초상
지하철은 언제나 적막했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며 차창 너머로 비치는 형광빛은 창백했고, 사람들은 그 불빛 아래서 하나같이 고요했다. 스마트폰을 응시하는 시선들, 감긴 눈꺼풀 아래 갇힌 표정들. 가끔 아주머니 서넛이 모이면 작은 소란이 일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출발과 함께 사그라졌다.
오늘도 그랬다.
정적이 흐르는 객실, 그 안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알 수 없는 중얼거림.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그 소리는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 눈을 감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와 통화하는 줄 알았다. 속삭이는 듯한 말투였고, 간혹 작게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엔 휴대전화가 없었다. 그저 허공에 대고 말을 걸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짓던 이들도, 어느새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선 눈길로 한 번 째려보더니,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동네에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 있었다. 늘 머리에 들꽃을 꽂고 다니던 여자. 아이들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놀렸다. 손가락질하며 웃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이 왠지 무서웠다.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그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어떤 이유로 그토록 혼잣말을 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지하철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이상하게도, 그 정적이 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객실 안에는 많은 말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담긴 단어들, 피하려는 움직임 속에 배인 감정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한 여성의 중얼거림.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채.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이.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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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하철에서 마주친 한 장면을 통해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읽게 될 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의 한 풍경이라 생각하며 글을 따라갔습니다. 조용한 객실,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 감긴 눈꺼풀 아래 잠긴 무표정들. 익숙한 풍경이었기에, 자연스레 저도 그 공간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성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눈을 감고 혼잣말을 하는 그녀. 처음엔 전화를 하는 줄 알았다는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라도 같은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기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객실 안의 사람들처럼 저도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저 자신이 그 지하철 안에 앉아 있는 승객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를 힐끔거리면서도 애써 무심한 척하는 사람들,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젊은 여성. 그 모든 반응이 마치 제 마음속의 거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희 동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머리에 들꽃을 꽂고 다니며 혼잣말을 하던 여자. 아이들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놀렸습니다. 저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을까요? 아니면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았을까요?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왜 그렇게 혼잣말을 했는지.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여성이 지하철에서 혼자 중얼거렸던 말들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가 듣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 속에서, 그녀는 잊힌 이름들을 부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글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제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는 그 한 문장. 너무나 강렬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다음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요? 그 순간,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걸까요? 글이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이 떠오르고, 제 안에서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치는 수많은 얼굴들 속에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 바쁘거나, 혹은 두려워서. 어쩌면 우리 역시 홀로 중얼거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지하철에서 혼잣말을 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순간의 저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