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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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봄, 그리고 뽀삐
노영선
햇살이 고운 봄날이었다.
여덟 명의 친구들이 편백나무 숲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이들이라 그런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시간은 과거로 흐르고, 웃음소리는 소녀 시절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손수 준비해 온 음식을 꺼내며 환하게 웃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의 추억을 들추는 일은 마치 오래된 책장을 펼치는 것과 같아, 넘길수록 더 깊어지고 따뜻해졌다.
새벽의 고요는 핸드폰 벨소리로 깨어졌다. 반가운 기척이라기보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전화를 건 이는 아들이었다. 떨리는 목소리 끝에서 슬픔이 흘러나왔다. "엄마, 뽀삐가…… 떠났어."
뽀삐.
아들에게는 친구이자 동반자였고, 외로운 시간을 메워주던 존재였다. 손바닥만 한 강아지가 그의 품에 안긴 지 십 년이 지났다. 어린 시절부터 늘 혼자였던 아들에게 뽀삐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었다. 그의 하루를 함께 열고 닫아주는 벗이었고, 말없이 그의 마음을 읽어주는 가족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고, 이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강아지의 죽음이 이렇게까지 가슴을 후벼 팔 줄 몰랐다. 어머니는 아들의 슬픔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었으나, 최소한 그의 눈물 앞에서 함께 아파할 수 있었다. 아들은 뽀삐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화장을 마친 뼈를 유리구슬로 만들어 곁에 두기로 했다. 맑고 투명한 구슬 속에 어린것이 단순한 뼛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품고 지켜왔던 사랑과 기억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뽀삐의 흔적은 아들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해마다 4월이면 가슴 한쪽이 허전해졌다. 누구에게는 충무공 탄신일이었으나, 아들에게는 뽀삐를 떠나보낸 날이었다. 검은 옷을 차려입고 유리함을 가만히 쓰다듬는 모습에서, 어머니는 문득 깨달았다.
아들은 한때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온전히 견디게 한 것은 뽀삐였다. 그리고 이제, 뽀삐를 떠나보낸 후에도 아들은 외롭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또다시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별할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으리라.
봄이 오면, 편백나무 숲에는 푸른 향기가 감돈다. 그 숲 어딘가, 따스한 햇살 아래 뽀삐가 뛰어놀고 있을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여전히 아들의 곁을 맴돌며 조용히 꼬리를 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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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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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선 작가의 '그날의 봄, 그리고 뽀삐'는 그저 반려견의 이별만을 다룬 글이 아니다. 작품 속에 녹아든 삶의 태도와 철학, 그리고 섬세한 미적 감각이 독자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을 통해 사랑의 지속성을 이야기하며, 상실을 아픔으로만 그치지 않고 성숙의 과정으로 풀어낸다. 이는 작가의 가치철학이 감정의 표출만이 아닌, 삶을 관통하는 깊은 성찰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작품은 봄날의 편백나무 숲에서 시작된다. 햇살이 비추는 공간에서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따스한 기억의 회귀를 의미하며,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과 정서적 연대감을 보여준다.
이 평온함은 새벽의 전화벨 소리로 깨진다. 작가는 인생의 밝고 따뜻한 순간과 필연적인 슬픔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을 부드럽지만 선명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이별의 순간을 단순한 아픔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아들이 뽀삐의 뼛조각을 유리구슬로 남기는 장면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사랑과 기억의 결정체’이며,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흔적이다. 유리구슬 속 뽀삐는 더 이상 한 생명의 물리적 잔재가 아니라, 아들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남는다.
이는 작가가 바라보는 사랑의 본질, 즉 사랑은 시간에 의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재탄생한다는 신념을 반영한다.
작품 속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외로움을 경험해 왔다. 뽀삐와 함께한 시간은 그를 외롭지 않게 만들었다. 뽀삐가 떠난 후에도 아들은 이전과 같은 고독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이는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연결된다. 작가는 ‘진정한 사랑은 이별 이후에도 남아, 우리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믿음을 작품에 담고 있다. 사랑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성을 가진다면, 사람 또한 새로운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영선 작가는 인간의 감정을 자연 속에서 직조해 낸다. 편백나무 숲의 싱그러움, 따스한 햇살, 새벽의 적막, 투명한 유리구슬 속 빛나는 흔적 등, 작품 전반에 걸쳐 자연의 요소가 감각적으로 묘사된다.
이는 인간의 감정을 더욱 깊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뽀삐가 떠난 후에도 봄이 오면 여전히 편백나무 숲이 푸른 향기를 머금듯이, 이별 이후에도 사랑은 남아 우리 곁을 맴돈다. 이는 자연을 통해 삶의 순환을 표현하는 작가의 미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영선 작가의 작품은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풀어낸다. 감정의 과잉 없이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따뜻한 정서가 스며 있으며,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통찰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사랑은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 외로움은 연대 속에서 치유된다는 가치관,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미의식이 작품 전반을 지탱하고 있다.
'그날의 봄, 그리고 뽀삐'는 반려견의 이별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랑과 기억이 어떻게 삶 속에 남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조용히 이야기하는 작품이 된다.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단단하게 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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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선 작가님께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글 그날의 봄, 그리고 뽀삐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한 독자입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이 찌르르 저려왔습니다. 단순히 반려견의 이별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 그리고 상실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는 인간의 내면을 담아낸 작품이라 느껴집니다.
뽀삐를 떠나보낸 아들의 마음을 따라가며,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한 만큼, 그 이별 또한 깊은 아픔을 남긴다는 것을요. 그러나 글의 마지막에서처럼, 결국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유리구슬 속에 새겨진 뽀삐의 흔적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남겨진 존재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함께하고 있을 테니까요.
특히 "그는 언젠가 또다시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별할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으리라."라는 문장에서 저는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둔 이별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언젠가 경험했던 아픔도, 결국은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음을 깨닫게 해 준 문장이었습니다.
또한, 편백나무 숲에서의 따뜻한 봄날과 새벽의 전화벨 소리가 대비되며, 생의 밝음과 어두움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이 지닌 서정적인 문체 덕분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작가님 덕분에 저는 사랑과 이별이 결코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따뜻한 시선과 깊이 있는 이야기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