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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앵초 ㅡ 허태기 시인

김왕식







흰앵초

시인 청강 허태기






베란다 화분에
하얗게 핀 앵초꽃
매화꽃보다 먼저
봄소식 전하네

25년 전
성북동 길상사
주지스님에게 받았다는
여러해살이풀
아내의 관심 탓인지
그 오랜 세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꽃 피우네

노란 꽃심에
수줍음 감추고
새하얀 이빨 드러내며
환한 미소로 서둘러
임 맞이하네

아! 벌써 오셨네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태기 시인의 시 ‘흰앵초’는 단순한 자연의 관찰을 넘어, 오랜 세월을 관통하는 기다림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담고 있다. 이 시는 한 송이의 앵초꽃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정성을 조용히 되새기게 하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허태기 시인은 일관되게 자연과 삶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순간과 영원이 맞닿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삶의 미학이 자리하며, 시인은 작은 생명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방식을 취한다. ‘흰앵초’에서도 그러한 철학이 드러난다.
특히 “25년 전 성북동 길상사 주지스님에게 받았다는 여러해살이풀”이라는 구절에서 시간의 층위가 쌓이며, 단순한 꽃이 아닌 오랜 인연과 기억을 품은 생명체로서의 의미가 강조된다.

또한, 이 시는 기다림과 맞이함의 미학을 담아낸다. “노란 꽃심에 수줍음 감추고 새하얀 이빨 드러내며”라는 표현은 앵초꽃이 마치 부끄러워하면서도 환한 미소로 반기는 존재처럼 의인화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꽃의 개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과 환영의 의미로 읽힌다.
마지막 구절 “아! 벌써 오셨네요.”는 꽃이 봄을 맞이하는 순간, 혹은 기다리던 이가 마침내 도착한 기쁨의 순간을 함축하며, 사소한 만남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허태기 시인의 시 세계는 소박한 아름다움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는 미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자연의 질서를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가 추구하는 시적 미학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정성과 관심 속에서 피어나는 자연스러움에 있다. 이 시에서도 아내의 꾸준한 관심 덕에 매년 꽃을 피운다는 점을 강조하며, 생명의 지속성과 인간의 보살핌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는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 즉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성실함과 자연을 경외하는 자세와 맞닿아 있다.

요컨대, ‘흰앵초’는 기억과 기다림,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노래하는 시다. 그 속에는 오랜 시간 꽃을 피워온 작은 생명을 통해 인연과 세월을 성찰하는 시인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는 허태기 시인의 시 세계가 가진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며, 그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아닐까.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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