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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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몇 가지 삽화
시인ㆍ수필가 김 유 조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우리말 ‘봄’은 불의 옛말 ‘블’과 온다는 뜻의 ‘옴’이 결합하여 생긴 말이라고 한다. 추위가 가고 따뜻한 온기가 오는 현상을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봄이 ‘보다’라는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세상천지에 볼 것이라고는 없던 겨울이 가고 볼만한 것들로 가득 찬 생명의 계절이라는 뜻이겠다. 봄을 스프링이라고 하는 영어는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는 의성어이자 의태어이니 역시 생명이 튀어나오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봄은 3월과 함께 시작하며 ‘3-1 만세’ 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또 해마다는 아니지만 대략 음력설과 비슷한 날짜라서 잔치 분위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의 탓인지 요즈음은 아파트촌에 태극기가 걸리는 모양도 희귀하여 그 장면이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지경이니 아쉽고 의아하다. 만세운동이 시작된 탑골 공원에서는 이날 해마다 기념식이 열리는데 공직자들 말고는 이곳을 매일 단골손님으로 찾아오는 노인들만 주요 참석자들이라서 모양이 좋지는 않다. 젊은이들도 참여하면 새봄의 기상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서 을사년 새해 분위기도 ‘으쌰 으쌰’ ‘얼쑤’ 어깨춤이 절로 날 텐데 말이다.
우리 삼일만세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팽배해진 민족자결원칙을 기초로 나라의 독립을 꾀하자는 민족자존의 거룩한 의거였다. 또한 우리의 운동은 바로 중국의 숨었던 민족혼을 일깨워서 그들의 ‘5-4 운동’을 촉발시켜 그 결과 산둥반도와 칭다오를 넘겨보았던 일제의 야욕을 물리치게 하였다. 중국교과서에도 이런 영향의 경과가 한때 들어갔으나 지금은 모두 빼고 없다고 한다. 칭다오에는 지금 거대한 5-4 기념탑이 해안가에 서있어서 우리 관광객들의 눈길도 끌지만 삼일운동과의 깊은 사연은 아무도 모른다. 요즘 파고다 공원 쪽으로 중국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니까 사연이 새겨진 조그만 모양의 5-4 기념탑 모형을 공원 안에 세워놓으면 중국인들에게 홍보효과가 되지 않을까 공상해 본다.
정동 길을 거닐다 보면 역사 깊은 여자고등학교의 담장 안에 댕기머리를 한 처녀의 청동입상이 뒤쪽으로 보인다. 아마도 유관순 열사의 뒷모습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의 모교를 바라보는 뒤태가 의연하다. 유관순 열사의 존재도 한때 정치지형에 따라서는 폄하가 심해서 심지어 존재자체가 지어낸 것이라는 둥, 열사의 피어린 만세운동을 훼절하는 만행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댕기머리 입상은 말 많은 저잣거리는 내다보지 않고 교정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 더 높이 세워져서 이쪽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을 내려다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봄이 오면 꼭 나오는 시구, T.S. 엘리엇의 황무지 첫 구절 ‘4월은 잔인한 달’을 생각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을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은 현대인의 의식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데 대한 엘리엇의 질타이자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다. 깨어나서 꽃과 잎을 피우라는 봄비와 바람은 겨울잠에 취한 라일락에게 잔인한 것일 수 있으나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 휴면해서야 되겠는가. 나라가 시끄럽다. 뉴스도 보기가 싫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눈을 번쩍 뜨고 봄을 소생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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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유조 교수
코리안드림 문학회 회장
김유조 시인은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국제 PEN한국본부 부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문학마을에서 소설로 등단한 김유조 시인은 장편소설 "빈포 사람들"과 소설집 3권, 시집 2권, 수필집과 평론집 등 다수를 출간하였으며 학술지 등의 저서도 다수 있고. 학술원 우수도서상, 김태길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한국동란과 민주화운동 등을 겪은 세대의 감회가 시집 속에 짙게 녹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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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제3회 헤밍웨이 문학상
2007.05~ 미국소설학회 회장
2002~2004 건국대학교 부총장
2000~2002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건국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경북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미국소설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부총장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저서>
어네스트 헤밍웨이 연구
존 스타인벡 평전
영미단편소설 연구
영국문학사
<시집 >
여행자의 잠언 외 3 권
<장편소설>
빈포 사람들
<소설>
세종대왕 밀릉 외 3 권
<수필집>
열두 달 풍경
<평론집>
우리시대의 성과 문학과 세태
<번역서>
클라라 반지
솔 벨로우
훼밍웨이 미공개 답변
미국문학사 등 다수
기타 학술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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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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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 작가의 '봄날의 몇 가지 삽화'는 단순한 계절의 전환을 넘어, 역사적 사건과 민족의식을 되새기며 시대정신을 성찰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영문학자로서 언어의 뿌리를 탐색하고,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서 3·1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육자로서 지성이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글은 봄의 어원을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블+옴’에서 비롯된 ‘봄’은 따뜻한 온기의 도래를 의미하며, ‘보다’와의 연관성 속에서 생동하는 시각적 경이를 내포한다. 이는 영어 spring의 어원과도 연결되며, 봄이 가진 역동성과 생명력을 강조한다. 작가는 언어적 탐구에서 멈추지 않고, 봄이 지닌 역사적 의미로 시선을 확장한다.
3·1 운동과 함께 시작하는 봄은 민족의 자각과 저항의 계절이다.
오늘날 그 정신은 점차 희미해지고, 탑골공원은 역사의 성지가 아닌 노인들의 휴식처로 변해버렸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애통해하며, 젊은 세대가 역사적 의식을 되찾기를 희망한다. 유관순 열사의 청동입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러하다. 한때 정치적 의도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던 그의 존재는, 마치 입상의 방향처럼, 현실을 등진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작가는 그것이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 위에,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봄의 모순이 아니라, 겨울잠에 빠진 현대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외침이다. 작가는 이 말을 빌려, 현실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뉴스조차 보기 싫어지는 시대지만, 그럴수록 눈을 뜨고 봄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조 작가의 작품은 학자적 탐구와 애국적 신념,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아우른다. 언어의 기원을 탐색하는 지적 깊이, 역사적 사건을 반추하는 성찰, 그리고 지성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당부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의 미의식은 그저 자연의 찬미가 아니라, 봄이라는 계절을 통해 시대정신을 일깨우고, 민족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데 있다.
결국 '봄날의 몇 가지 삽화'는 봄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를 묻는 질문이다. 이 글을 읽은 독자는 단순히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봄’을 일으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