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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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청람 김왕식
1. 성실한 장사꾼, 달삼
새벽 공기가 싸늘했다. 하늘엔 아직 별이 떠 있었고, 짙은 안개가 골목을 감쌌다. 골목길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남루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의 주인공, 달삼은 등에 묵직한 짐을 둘러메고 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바구니엔 전날 밤 직접 수확한 상추와 배추가 가득했고, 손에는 단단한 감자와 무가 묵직한 꾸러미로 들려 있었다. 손끝이 시려 왔지만 그는 익숙한 듯 한 손으로 꾸러미를 고쳐 잡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터에 도착하니, 주변은 아직 한산했다. 장터 사람들 중 가장 먼저 나와 자리를 잡는 사람은 늘 달삼이었다. 좌판을 펼치고 채소를 가지런히 놓고 있자,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달삼 아재 또 먼저 와뿟네!"
옆자리에서 장사하는 덕수 아재였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도착했지만, 단 한 번도 달삼보다 먼저 온 적이 없었다.
"먼저 와야 좋은 자리 맡고, 손님도 먼저 맞이하는 거 아니겠소?"
달삼은 껄껄 웃으며 채소 더미를 정리했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었지만, 장터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달삼은 성실한 장사꾼이었다. 항상 손님들에게 먼저 인사했고, 좌판을 지나가는 이들 하나하나를 정겹게 맞았다.
"아이고, 어서 오이소! 오늘도 장 보러 왔능교?"
"달삼 아재네 채소가 제일 싱싱하데이. 난 무조건 여기서 산다."
"그라믄예, 단골이니께 내가 오이 몇 개 더 얹어드릴게요."
달삼의 좌판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따뜻한 자리였다. 사람들은 달삼의 웃음에 끌렸고, 그의 성실함에 신뢰를 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몰랐다. 그가 왜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지, 어떤 사연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는지.
2. 지나간 상처
달삼이 처음부터 장터에서 장사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때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아내와 두 아이를 키웠다.
그의 아내, 정순은 부지런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가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냈다. 가게 안에서는 정순이 손님들에게 직접 담근 장아찌와 집에서 만든 두부를 권했고, 달삼은 푸근한 미소로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행복했던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정순은 이유 없이 피곤해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점점 그녀의 몸이 쇠약해졌다. 병원에서는 병이 깊다고 했다. 치료비가 필요했다. 가진 돈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그는 가게를 팔았다.
"당신, 괜찮겠어?"
정순이 미안한 듯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가게는 다시 열 수 있지만, 당신은 다시 돌아올 수 없잖여."
그러나 정순은 끝내 그를 남겨두고 떠났다.
가게 문을 닫고, 텅 빈 가게 안에 혼자 남아 있을 때, 달삼은 더 이상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흔적이었다. 그녀 없는 공간에서 그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거리로 나왔다.
장터 한구석, 가장 허름한 자리에 좌판을 펼쳤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아이들도 키워야 했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그렇게 5년을 버텼다.
그런데 그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3. 무너진 하루
그날따라 하늘은 종일 흐렸다. 장터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길한 기분이 든다고 중얼거렸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습한 바람이 가게 천막을 흔들었다. 달삼도 이상한 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채소를 정리하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오후 무렵, 갑자기 하늘이 갈라지듯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가게 천막들이 비에 젖어 처지고, 좌판 위에 놓인 채소들은 흠뻑 물을 머금었다. 손님들은 우산을 펼쳐 들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고, 장사꾼들도 허둥지둥 물건을 덮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그냥 짐 싸야 되겄는디!"
덕수 아재가 난감한 표정으로 좌판을 정리하며 말했다. 달삼은 무거운 손길로 감자 상자를 덮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은 한 사내가 다가왔다. 깔끔한 양복을 입었지만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손에는 노트 몇 개를 움켜쥔 채였다. 낯이 익었다. 장터 관리사무소 직원이었다.
"달삼 씨, 자리 문제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번 달부터 장터 자리를 재조정합니다. 달삼 씨 자리, 다음 달부턴 없습니다."
달삼은 움켜쥔 손을 천천히 폈다.
"뭐라꼬?"
"장터 재배치하면서 새 입점 상인들한테 내줘야 해서요. 이 구역은 철거 대상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럼 난 어딜 가라는 말이요?"
달삼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른 자리 알아보셔야죠."
"나는 5년 동안 이 자리서 장사했소. 다 아는 손님들도 있고, 내 살림도 여기서 지어가고 있는디, 갑자기 내쫓으면 내가 어디로 가란 말이요?"
관리소 직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새 입점 상인들이 계약을 마쳤고, 이번 주 안으로 철거 작업이 시작될 예정이에요."
"계약을 했다고? 그럼 나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벌써 자릴 내준 거요?"
직원은 말을 아꼈다. 그러다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달삼은 관리소 직원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눈앞이 아득했다. 온몸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되지요… 이러면 안 되지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흐려졌다.
덕수 아재가 다가와 손을 얹었다.
"달삼아, 어쩔 기고?"
달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빗줄기가 한층 거세졌다. 철거라니. 여기를 떠나라니.
이곳은 단순한 장사터가 아니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유일하게 버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일하면서 삶을 견뎌낸 자리였다. 이제 그 자리마저 없어진다면…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비가 계속해서 좌판을 두드렸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순아…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노."
그는 눈을 감았다.
4. 선택의 순간
그날 밤, 달삼은 촛불을 켜고 흐린 눈으로 아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그녀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이제 어떡해야 하노."
달삼은 사진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가게를 접고 장터로 나온 후, 이 자리만큼은 지켜왔다. 힘든 날도 많았지만, 장터에서 버티는 동안 삶을 견뎌낼 힘이 생겼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빼앗긴다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이 무겁게 방을 감쌌다. 방 한구석에는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들 녀석은 꿈속에서 엄마를 찾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우리 집도 없어지는 거야?"
아이가 걱정스럽게 던졌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이 장터에서 쫓겨난다면, 이 작은 방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정순아,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노."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나 오래 울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달삼은 평소처럼 새벽에 장터로 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는 좌판을 정리하며 평소처럼 손님을 맞았다. 장터는 언제나처럼 분주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무거웠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터 한쪽에서 갑자기 고함이 들렸다.
"누가 좀 도와주이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한 노인이 길 한가운데서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달삼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감자를 내려놓고, 곧장 달려갔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노인은 허름한 옷차림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눈빛이 흐릿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만 쉬면…"
그러나 노인의 몸은 다시 휘청거렸다. 달삼은 그를 부축해 가까운 좌판 앞에 앉혔다.
"뭘 좀 드셔야 겠습니다. 많이 허기지셨지요?"
그는 망설임 없이 좌판에서 감자 한 봉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마른 입술을 떼며 힘겹게 감자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걸… 그냥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어르신, 이런 날씨에 허기지고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어서 드세요."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감자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감자를 꼭 쥐고 있었다. 눈가가 붉어졌다.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순간, 노인의 얼굴을 본 달삼은 멈칫했다.
그 눈빛, 그는 너무나 익숙한 눈빛이었다.
몇 년 전, 아내를 떠나보내고 가게를 정리한 후, 길거리에 혼자 앉아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는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벽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한 노점상이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내밀었다.
"힘내이소. 사람은 버텨야 합니더."
그 한 마디가, 그 국밥 한 그릇이, 그날 그를 살렸다.
지금 자신이 감자를 건네고 있는 이 노인은, 그때의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
달삼은 눈을 감았다.
"버텨야 한다. 지금처럼."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덕수 아재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달삼아, 니는 니 자리 안 뺏긴다."
달삼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아재?"
"장터 사람들 다 모여서 서명받았다. 니 자리 못 뺏긴다고 관리소에 갖다 줄 기다."
"……"
달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장터에서 니만큼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 어디 있노? 니가 떠나면 장터가 허전해진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달삼은 천천히 좌판 위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리, 이 작은 좌판이 그에게는 단순한 장사터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는 버텼다. 삶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해 감자 한 봉지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난 아직 살아낼 힘이 있구나."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재,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날 장터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달삼의 마음속에는 오래된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5. 다시 살아내는 삶
며칠 뒤, 장터 관리소에서 연락이 왔다.
"달삼 씨, 장터 자리 문제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의 손에서 전화기가 미끄러질 뻔했다.
"…정말이요?"
"예. 시장 상인들이 한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내셨고, 결정이 번복되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밖에서는 새벽안개가 스며들 듯 장터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달삼은 다시 평소처럼 새벽 장터로 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좌판에는 여전히 신선한 채소가 줄지어 놓였지만, 그곳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그를 믿어주는 사람들, 그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 그리고 그가 지켜야 할 자리.
그는 장터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수 아재가 히죽 웃으며 그를 툭 쳤다.
"아재, 인생이란 게 말이여… 한 놈이 쓰러질 것 같으면 다 같이 부축하는 거 아니겠능교?"
그 말을 듣고 달삼은 피식 웃었다.
이 장터에서 그가 팔았던 것은 단순히 채소가 아니었다.
그는 삶을 팔았고, 삶을 나눴다.
비 오는 날이면 손님들에게 미소를 나눴고,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감자를 쥐여줬다. 그리고 오늘, 그는 자신이 준 것보다 더 큰 것을 돌려받았다.
그날, 장터에는 다시 바람이 불었다. 구름이 걷히고, 따뜻한 햇살이 좌판 위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늘 이겨내잖아. 난 당신이 포기하는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어."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난 아직 살아낼 힘이 있다."
그는 감자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무심코 손에 쥔 그것이 묵직했다.
이 감자는 단순한 감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이었다.
그는 천천히 감자를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손님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어서 오이소! 오늘도 장 보러 왔능교?"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더 힘차고 따뜻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장터를 감싸 안은 바람이, 채소 더미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인생은 팔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함께 나누고 살아내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도, 비가 오면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비도 와야 좋은 날이 더 소중해지는 기라."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는 묵묵히 삶을 살아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인생이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