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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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계절을 붙잡고 싶어
정용애
한 해가, 아니 삼 년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처음 시골로 내려왔을 때, 전원생활이 주는 새로움에 하루하루가 마치 선물 같았다.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반짝이고, 산새들이 어제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열어주었다. 산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봄에는 연둣빛 새싹이 돋고, 여름에는 짙푸른 잎이 바람에 몸을 맡겼다. 가을이면 노란 물결이 산허리를 감싸고, 겨울에는 하얀 숨결이 대지를 덮었다. 자연의 시간은 흐르지만, 언제나 그대로였다.
텃밭에서 난 채소는 밥상을 풍성하게 했다. 직접 기른 상추를 한 장 뜯어 싱그러운 냄새를 맡으면, 손끝으로 전해지는 자연의 온기가 마음까지 따뜻하게 했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닦으며 땅을 일구었고, 가을바람이 불 때면 무를 뽑아 시원한 물에 씻어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맛이란! 도시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신선함이었다.
병아리를 키우고 싶어 계란을 사다 부화시켰다. 어느 날, 계란 껍데기가 서서히 갈라지더니 조그만 부리가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삐약삐약, 생명의 첫울음이 어찌나 경이로웠던지! 조그맣던 병아리들은 어느덧 제법 커서 텃밭을 온통 휘젓고 다녔다. 배추밭을 헤집고, 상추밭을 쪼아대도 미워할 수 없었다. 녀석들이 노을빛을 등에 지고 마당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렇게 삼 년을 살았다. 아침이면 산 아래 군부대에서 울리는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고, 저녁이면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하루를 마무리했다. 시골의 삶은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그래서 더 따뜻했다.
어느 순간, 가슴 한편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평온했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는 했지만, 나 혼자만의 기쁨으로 충분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나의 하루가 자연으로 충만하듯, 누군가에게 나의 따뜻함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이 삶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
오봉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사라지는 햇빛을 손으로 잡아보고 싶어졌다. 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해는 산 뒤로 스며들 듯 사라지고, 남겨진 것은 바람의 노래와 종소리뿐이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향해 가야 할까. 자연이 내게 준 이 기쁨을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을까. 여운처럼 남아 마음을 울리는 종소리 속에서, 나는 나아갈 길을 천천히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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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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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단순한 전원생활의 기록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누는 삶으로 향해야 함을 깨닫는 과정이다. 글은 시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이를 통해 삶의 철학을 형성해 나간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소박하지만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 산이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듯, 텃밭의 채소가 성장하듯, 생명이 탄생하고 자라나는 과정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 기쁨은 점차 새로운 질문을 불러온다. "사는 날 동안 남을 위해 배려하며 살 때 그 기쁨이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 개인적인 만족에서 더 나아가 타인과 나누는 삶을 고민하는 철학적 태도가 돋보인다. 작가의 삶의 가치는 그저 자연을 누리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통해 더 깊은 나눔과 관계를 추구하는 데 있다.
글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과 인간의 시간을 교차시키는 섬세한 묘사에 있다. "지는 해를 꼭 잡고 싶어졌다"라는 문장은 시간의 덧없음과 그것을 머물게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함축한다. 또한 "산아래 군부대의 저녁 종소리가 마음을 울린다"라는 표현은 시골 풍경 속에서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며, 내면적 울림을 형성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풍경 묘사를 넘어 감정과 사유를 녹여내는 방식으로, 작품의 미의식을 형성한다.
요컨대, 이 글은 자연과 인간, 삶과 시간, 기쁨과 아쉬움이 어우러진 한 편의 서정적인 에세이다. 전원생활의 즐거움 속에서도 인간은 관계를 통해 더욱 충만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으며, 작가는 이를 감각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산의 노을처럼 스며드는 여운은 독자에게도 깊은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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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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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글을 읽고 난 후, 마음 한편에 오래도록 남는 여운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시골에서의 삶을 기록한 글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점차 깊어지는 작가님의 사색과 삶의 철학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에까지 스며들어, 저 역시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전원생활의 기쁨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 작가님의 글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아침이면 산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시고, 텃밭에서 자란 채소를 수확하고, 병아리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순수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도 한동안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기에, 작가님께서 묘사하신 감정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글의 후반부로 갈수록, 전원생활의 기쁨 속에서도 작가님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공허함이 묻어났습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는 것만 같았다”라는 문장에서 멈춰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이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충분한 평온과 만족을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는 감정.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나누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사는 날 동안 남을 위해 배려하며 살 때 그 기쁨이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라고 적으셨지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 또한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달려왔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나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는 그것을 충분히 나누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상은 점점 더 개인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기에 바쁘고, 때로는 너무 많은 관계가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자연 속에서 홀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나누는 삶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닫게 되셨습니다. 저는 이 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한 삶을 동경하며 자연으로 떠나지만, 결국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마지막 부분, "지는 해를 꼭 잡고 싶어졌다"라는 문장은 저의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이런 순간을 마주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은 순간,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붙들고 싶어지는 감정 말입니다. 하지만 해는 산 너머로 사라지고, 남는 것은 종소리와 바람의 노래뿐이지요.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붙잡으려 해도 시간은 흘러가고,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나누고 베푼 것뿐이겠지요.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저도 저만의 ‘지는 해’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글을 읽기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글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마음속에서 울림을 남겼습니다.
작가님,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의 사색을 통해 깊이 있는 철학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고민과 성찰이 저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빛과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