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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는 길 ㅡ 정용애 작가

김왕식







고향 가는 길





정용애



"오늘 이 하루를 맡깁니다."
기도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차에 몸을 싣는다.
고향으로 가는 길.
그리움으로 차오른 땅,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었던 곳. 김과 멸치, 미역, 전복의 짙은 향기가 스며 있는 바다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깃든 곳.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서울을 벗어나자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풍경이 차창 너머로 스친다. 높은 산자락엔 여전히 눈이 남아 있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봄기운이 완연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마른 가지마다 연둣빛 새싹이 돋아난다. 어딘가에서 아기 손 같은 잎사귀들이 고개를 내밀고, 촉촉한 바람 속엔 봄 내음이 번진다.
입가에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
산 넘어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고향이 가까워진다.

고향의 공기는 언제나 익숙한 온기를 품고 있다.
문턱을 넘는 순간,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국 같은 냄새가 마음을 감싼다. 형부와 언니가 반갑게 맞아주고, 한참을 이야기 나눈 뒤,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한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떠난 지 어느덧 45년.
돌아온 횟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니 열 번도 채 되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하지만 오늘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파도에게 묻다

이튿날, 바닷가로 향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수영하고, 모래사장을 뛰놀던 갱변. 파도가 넘실대는 그곳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멀리서 달려오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들에게 묻는다.
"잘 지내니?"
갈매기의 울음이 바람을 타고 흐르고, 구름은 하늘 높이 떠돌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파도는 잔잔하게 출렁이며, 오래된 그리움을 실어 나른다.

그때였다.
물과 육지의 경계선, 그곳에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파도가 다가와 발끝을 적셔도 미동조차 없는 녀석.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켜온 듯한 여유로운 눈빛, 반쯤 감긴 눈.
바다를 닮은 듯한 그 모습에, 문득 깨닫는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고양이를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인연을 맺어준 그 집으로 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백나무.
"어쩜 저렇게 예쁘게 자랐을까."
비바람과 태풍을 이겨내며, 어느덧 한 그루의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진다.
세월은 흘렀고, 그 사이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

곰탕의 기억

저녁이 되자 형부와 언니, 그리고 중매를 서주신 분들과 둘러앉아 옛이야기를 나눈다.
문득 떠오른 곰탕집의 추억.

"미소 아빠!"
언니가 남편을 부르며 깔깔 웃는다.
"앗따, 그때 그 곰탕집 생각나지라우?"

모두가 익히 아는 이야기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입을 연다.
"우리 형제들에겐 살짝 부끄러운 추억이지만, 누군가에겐 웃음을 주었지요."

그날, 큰집 오빠, 형부, 언니, 남편과 함께 곰탕을 먹으러 갔던 날.
커다란 그릇에 담긴 뽀얀 국물을 보고 갸우뚱했다.
‘곰탕?’
곰이라면 나무 위에 올라간 모습만 봤지, 실제로 본 적도 없었는데…
속삭이듯 언니에게 물었다.
"우리나라에 곰이 그렇게 많아? 식당에서도 먹을 정도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니가 손뼉을 치며 깔깔 웃는다.
"오매, 어째 불까! 서울에 살면서 곰탕도 못 먹어봤다냐?"
그 웃음소리에 오빠까지 합세한다.
"김서방, 이게 뭔 소리여? 아이고 동생아, 이건 곰이 아니라 소뼈국이제!"

그 순간,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날의 곰탕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세월이 흘러도 이 이야기를 꺼내면 여전히 배를 잡고 웃는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생각한다.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고향을 뒤로하며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옛 기억을 두드린다.

"내년에도 올 거야. 남편이 운전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고향에서의 하루가 저문다.
그리움도, 추억도, 떠나온 세월도 모두 이 길 위에서 반짝인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고향의 바다에 작별을 고한다.

멀어지는 풍경 속, 하얀 고양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한가로이 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묻는 듯하다.
정말 다시 올 거냐고.

나는 속삭인다.
"그래, 다시 올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 글은 여행의 기록을 넘어,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세월이 만들어낸 감성을 섬세하게 담아낸 산문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조용히 펼쳐 보이며, 고향이라는 공간이 물리적 장소를 넘어 삶의 뿌리이자 기억과 감정의 결집체임을 보여준다.

작가의 삶의 철학은 ‘감사와 애정, 그리고 유연한 수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문장, "오늘 이 하루를 맡깁니다."에서 보이듯, 작가는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하나의 ‘선물’로 여기고 있다. 그리움 속에서도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고, 떠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보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에 집중하는 태도는 작가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변화에 대한 수용과 긍정적인 시선이 글 곳곳에 배어 있다. 한때는 자주 찾지 못했던 고향이지만,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오랜 세월 동안 변한 것들 앞에서도 애잔한 감정을 넘어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대목에서 보듯, 과거의 실수마저도 웃음으로 승화할 줄 아는 여유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 자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성숙한 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담백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를 유지하면서, 감각적인 묘사와 상징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해 풍경과 정서를 조화롭게 그려낸다.

"고향의 공기는 언제나 익숙한 온기를 품고 있다."

"파도가 잔잔하게 출렁이며, 오래된 그리움을 실어 나른다."

"멀어지는 풍경 속, 하얀 고양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러한 문장들은 단순한 설명을 넘어, 독자로 직접 고향의 풍경과 감정을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하얀 고양이’는 작품의 핵심적인 상징으로 작용한다.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졸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은 고향의 변함없는 존재감과도 같으며, 동시에 떠나는 작가를 바라보며 묵묵히 물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가 속삭이는 "그래, 다시 올게."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운명적인 귀속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계절의 변화를 통해 고향과 삶의 순환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점도 돋보인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풍경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인생이 흘러온 시간을 떠올리고, 동백나무를 통해 견디고 성장하는 삶의 의미를 사유한다. 마치 동백나무가 비바람을 이겨내며 고목이 된 것처럼, 작가 역시 세월을 지나며 더욱 단단해진 삶을 바라보고 있다.

이 글은 고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삶의 여정을 조용히 반추하는 작품이다. 그저 향수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균형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찰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작가는 삶을 지나오며 겪은 감정과 깨달음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지극히 따뜻하고 섬세하다.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문장과 섬세한 감각적 묘사를 통해 고향의 풍경과 감정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미학적 감각이 탁월하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고향이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기억과 정서, 그리고 삶의 본질을 담고 있는 곳이라는 깨달음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작가는 오늘을 감사하며,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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