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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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리, 흐르는 미소
안 최호
경안천은 오늘도 햇살을 안고 흐른다. 안개가 스르르 걷히면 마을은 누각처럼 고요하다.
마을회관 처마 밑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아낙들은 국수를 삶으며 도란도란 정을 나눈다. 흐르룩, 따끈한 국수 한 그릇에 세월을 말아 삼킨다.
남정네들 탁주 한 사발에 목을 축이고 흥얼흥얼 가락을 맞추면 창가 바람도 장단을 탄다.
노인들은 화투장을 넘기며 낡은 손끝에 패 한 장, 주고받는 눈짓 사이로 웃음이 번진다.
그때, 학원에서 돌아온 손주 문턱을 넘자마자 할배 무릎에 폭 안긴다. 할배는 등을 토닥이며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를 멀찍이 바라보던 누렁이 꼬리를 살랑이며 반긴다.
텃밭을 일구는 손길,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의 여유, 국수 삶는 연기 속에 번지는 따뜻한 정.
트럭 기사, 잠시 속도를 늦춘다. 창밖으로 흐뭇한 미소를 남기고 다시 길 위를 달린다.
서하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강물처럼 유유히, 햇살처럼 따스하게,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천년을 잇는 마을, 그 이름도 서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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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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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최호 작가의 서하리, 흐르는 미소는 전원의 목가적 삶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시는 한적한 마을의 정경을 그리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트럭 운전을 하며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실천하는 작가의 가치관이 이 작품을 통해 뚜렷이 드러난다.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미학적 특징은 ‘흐름’에 있다. 경안천의 물줄기는 햇살을 품고 유유히 흐르고, 마을은 그 강물처럼 평온하게 지속된다. 시적 화자는 마을회관의 정경, 국수를 삶는 아낙들의 모습, 노인들의 화투판, 학원에서 돌아온 손주의 모습까지 하나의 연속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치한다. 이는 시간의 흐름이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삶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시는 따뜻한 공동체적 정서를 강조한다. 한 그릇 국수에 녹아든 세월, 탁주 한 사발과 함께 흘러나오는 흥얼거림, 노인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화투장과 눈짓 사이의 교감. 이러한 장면들은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충만함을 추구하는 작가의 미의식을 잘 보여준다. 특히, “트럭 기사, 잠시 속도를 늦춘다. 창밖으로 흐뭇한 미소를 남기고 다시 길 위를 달린다.”라는 구절은 작가 자신을 암시하며, 그의 삶과 철학을 가장 잘 집약한 장면이다. 트럭 운전 중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마을의 풍경은, 그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깊이 음미하는 ‘관찰자’임을 시사한다.
작가는 전원적 삶의 이상향을 꿈꾸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시 속 인물들은 여전히 노동하고, 세월을 삼키고, 삶을 나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따스한 유대를 형성하는 모습이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는 안 최호 작가가 단순한 전원의 미화를 넘어서, 삶의 본질적 가치—소박함, 나눔, 유대감—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결국, 서하리, 흐르는 미소는 단순한 마을의 풍경이 아니라, 작가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 자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서하리는 고요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트럭 기사는 그 마을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속도를 늦춘다. 이는 현대인의 바쁜 삶 속에서 ‘멈추어 바라봄’의 가치를 환기하는 순간이며,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안 최호 작가의 시적 세계는 자연과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 속에서 피어난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정경 묘사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깊은 철학적 태도를 담고 있다. 이 시는 안빈낙도의 정신을 그리되, 현실에 뿌리를 둔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점에서 더욱 빛난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