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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것을 놓아주는 마음

김왕식








흐르는 것을 놓아주는 마음







바람이 분다. 창가에 서면 아침의 바람결이 볼을 스친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날카롭게 스며든다. 바람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다 마음이 헛헛할 때면, 그 바람을 붙잡고 싶어진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어서, 혹은 사라질 것이 두려워서. 바람은 가둘 수 없다. 손바닥에 움켜쥐려 하면 할수록 허공으로 빠져나간다. 끝내 손끝에 남는 것은 바람의 부재뿐, 사라진 바람의 빈자리만이 허전하게 남는다.

햇살도 그렇다. 어느 날은 어깨를 감싸 안는 따뜻한 손길이 되고, 또 어느 날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된다. 처음에는 그 온기가 좋아서 가슴속에 꼭 담아두고 싶어진다. 햇살을 품으려 하면, 어느 순간 마음을 새까맣게 태워버린다. 처음엔 포근했던 온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뜨겁고 버거운 불길이 되어버린다. 마치 애틋한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상처가 되듯이. 붙잡고 싶었던 기억이 되레 마음을 할퀴는 날도 있는 법이다.

새벽녘,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한순간의 보석처럼 영롱하다.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모습이 어쩌면 저토록 찬란할까. 손끝으로 닿는 순간, 이슬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손안에 남은 것은 텅 빈 흔적뿐. 마치 간절했던 눈물이 흐르고 난 뒤의 허망함처럼. 어쩌면 이슬의 운명은 그저 흐르는 것,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애써 붙잡으려 하면, 그 순간 더 이상 빛나지 못하는 것인지도.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처음엔 눈부시다. 설레는 감정이 심장을 뛰게 하고, 세상의 색조차 다르게 보이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 사랑도 변한다. 손을 맞잡던 온기가 점차 흐려지고, 가슴속 깊이 남겨진 말들이 점점 무거워진다. 어제의 다정했던 목소리가 오늘의 침묵이 되고,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떠나가는 그림자가 길어진다. 처음에는 그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 아무리 아름다웠던 감정도, 시간 속에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는다.

물도 마찬가지다. 개울은 흐르고, 강은 바다로 간다. 흐르는 것은 멈출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막아두려 한다. 흘러가는 것이 아쉬워서,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가둬둔 물은 언젠가 넘쳐흐른다. 넘치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미움도. 그것을 가두면, 결국 마음속에서 넘쳐흘러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즐거운 노래도 혼자 부르면 눈물이 되고, 향기로운 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린다. 그러니, 흘러야 할 것은 흘려보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품는다. 한때 빛나던 순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 가슴을 채웠던 감정들. 그것들을 영원히 붙잡아둘 수는 없다. 때로는 놓아주는 것이 더 깊은 의미가 된다. 바람이 흘러야 다시 불어올 수 있고, 햇살이 스쳐 지나가야 다시 따스해질 수 있으며, 이슬이 사라져야 다시 아침이 온다. 그러니, 흐르게 두어라. 출렁이게 두어라.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때론 더 깊은 사랑이다.

바람이 분다. 저 멀리서부터 다시 불어온다. 지금은 떠난 것들이 언젠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바람 속을 걸을 날이 올 것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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