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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선생 ㅡ허만길 스승님을 생각하다

김왕식







백결선생
ㅡ허만길 스승님을 생각하다






시인 변희자





물리치료실에
치과에
안과에
내과에 계신다

늦게까지 교정에 있거나
수업 끝나고 집에 늦거나
골목길 헤매는 제자 찾아
삼만 리를 걸으시던 선생님

백결선생이라 불렀었는데
계신 곳이 달라진 선생님

이제 교실에 서실 수 없고
우리도 학생은 아니다
세월은 길을 삼켜 버렸다

교실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직도
희미하게 들리는 듯하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 시는 변희자 작가가 오랜 세월 동안 존경해 온 고등학교 스승 허만길 선생님을 회고하며 헌사하는 작품이다. ‘백결선생’이라는 시제는 조선시대 백결 선생처럼 검소하고 소박한 인품으로 제자 사랑을 실천하신 스승의 인격을 상징한다. 특히 시의 주인공은 이제 병원을 전전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제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삼만 리를 걸으시던’ 열정의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이 시의 미학은 절제된 언어와 간결한 묘사 속에서 깊은 존경과 정서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1연에서 ‘물리치료실에 / 치과에 / 안과에 / 내과에 계신다’는 구절은 단순 나열 같지만, 선생님의 연로함과 삶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연에서 ‘삼만 리’라는 표현은 과장된 거리의 이미지를 통해 스승의 헌신과 제자 사랑을 극적으로 부각하며, 오늘날 교육의 상실된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3연에서는 현실의 부재와 세월의 무상함을 강조하며, ‘계신 곳이 달라진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생존 여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도 이별의 슬픔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세월은 길을 삼켜 버렸다’는 구절은 시간의 흐름이 사람과 관계, 기억의 장면까지도 집어삼킨다는 존재론적 인식을 표현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여전히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청의 환영을 통해, 제자에게 남은 스승의 영향력과 그리움의 깊이를 암시한다.

이 시를 쓴 변희자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제자 됨’을 잊지 않으며, 스승을 향한 존경과 예우의 자세를 지켜가고 있다. 이는 그의 문학관이 단지 표현의 기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관계의 윤리를 중시하는 가치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작품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기억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시적 사유를 담고 있으며, 감정의 절제를 통해 오히려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미의식을 드러낸다.

요컨대, 이 시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다른 이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따뜻한 증언이며, 존경과 사랑, 교육과 제자도,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직조한 시인의 진심 어린 경의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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