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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 그 가짜 문 앞에

김왕식










비상구
—그 가짜 문 앞에



청람 김왕식





그날 새벽,
호텔은 평화로웠다.
하얀 침대와 부드러운 베개 위로
사람들은 안심의 꿈을 꾸고 있었다.
“최고급 방음, 완벽한 소방 설비,
무엇보다 안전한 비상구!”
광고는 웃으며 약속했었다.



그러나 불은 무대 뒤에서 시작되었다.
전깃줄 하나, 불꽃 하나,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붉은 천장을 찢었다.
화재경보는 조용했고,
관리자는 먼저 도망쳤고,
비상 조명은 깜빡이며 묵묵부답.



비상구는,
문이었다.
비상구라 씌어진 철문,
형광색으로 친절하게 인쇄된 ‘출구’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짜일 거라고,
‘거기만 가면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노인도, 아이도, 엄마도, 학생도.
화마는 그들의 등 뒤를 따라왔고
그들은 그 문 앞에서
멈췄다.
움켜쥐고, 밀고, 울부짖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가짜였다.
비상구는 벽이었다.
장식용 문이었다.
사진 찍기 좋으라고 만든 인테리어였다.
‘그럴 리 없잖아’는
이미 뜨거운 공기에 삼켜졌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 세상엔 많다.
비상구처럼 생긴 것들.
열릴 듯 말 듯한 말들.
“공정한 경쟁”, “성장 기회”, “법의 보호”,
“이 나라는 안전합니다”라는 방송.
그럴싸한 문양과 색,
다들 달려간다.



그 문들이 가짜인지
누가 확인하던가.
우리는 문구를 믿는다.
“합법”, “공식”, “정부 인증”,
‘이 문을 지나면 희망이 있다’고.
그러나 그 문은
잠겨 있고, 벽이며,
거짓으로 만든 구조물이다.



아이들은 학원으로 몰리고
청년들은 스펙이라는 문 앞에서
천 번을 두드린다.
문은 조용하다.
부모들은 아파트라는 문에 인생을 건다.
그러나 문은, 웃는다.
“죄송합니다, 입주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문은
투표라고 쓰여 있다.
어떤 문은
희망복권, 혹은 스타트업.
소외된 자들일수록
더 간절하게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문의 손잡이는
항상 안쪽에 있다.



그렇다.
문은 많고, 사람도 많고,
문짝 위에 씌워진 말은 더 많다.
그러나 진짜 비상구는 드물다.
제대로 열리는 문은 적고,
사람들이 살아 나갈 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불은 계속 나고 있다.
어디에선 금융이 불타고,
어디에선 양심이 타들고,
어디에선 신뢰와 정의가 연기로 사라진다.
사람들은 또 믿는다.
또 문을 향해 달린다.
이번엔 진짜일 거라 믿으며.



이제, 우리는
문을 보기 전에 물어야 한다.
누가 만들었는가,
누구를 위해 닫아놓았는가,
그리고 이 문은
정말 나를 살릴 수 있는가.



비상구.
그 이름의 무게가
사람의 생명을 결정짓는 세상에서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은
더 이상 풍자가 아니라
참극이다.






비상구라 씌워졌다고 다 출구는 아니다.
그 문은 어디로 통하는가?
우리는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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