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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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라는 온도
청람 김왕식
정류장은 단순한 일상의 지점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간절함이 모이고, 또 누군가의 체념이 머무는 삶의 문턱이다. 버스는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만, 그 시간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사정까지는 헤아리지 못한다. 시간표는 숫자이고, 사람은 사연이다.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버스를 향해 숨을 몰아쉰다. 등에는 하루치 피로가 매달려 있고, 얼굴은 온통 불빛처럼 벌겋다. 단 한 발짝, 단 한순간만 더 빨랐더라면. 그러나 버스는 이미 문을 닫는다. 그가 뻗은 손끝을 외면한 채, 바퀴는 묵묵히 돌아간다. 그리고 정류장 위, 그의 그림자가 길게 주저앉는다. 세상은 그런 식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도 가차 없을 때가 있다. 늦음은 죄가 아닌데, 문은 닫히고 만다.
다시 또 한 사람. 비슷한 속도로 달려오는 이에게 이번엔 버스가 멈춘다. 운전기사는 룸미러 너머의 풍경을 놓치지 않았다. 헐떡이는 걸음 속에 묻힌 사정을 읽었다. 몇 초, 아니 몇 걸음을 기다려주었을 뿐인데, 세상은 그 작은 멈춤으로 따뜻해진다. 문이 열리고, 그는 숨을 고르며 탄다. 그의 입가에 맺힌 것은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라, ‘살아 있어 좋다’는 작고 진한 환희였다.
이 두 장면은 버스의 출발과 정차를 넘어, 인생의 두 얼굴을 그린다. 하나는 냉정한 시간의 지배 아래 놓인 무정한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호흡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의 품이다. 버스 기사 또한 두 부류로 나뉜다. 시간표만 바라보는 이와, 사람의 땀과 눈빛을 읽는 이. 정류장은 같은 곳이지만, 누군가의 눈길 하나가 세상을 다르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달리고 있다. 어떤 날은 정류장에 먼저 도착하고, 어떤 날은 늦게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다. 중요한 건 그때, 누군가가 ‘잠시 멈춰주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스스로도 누군가를 위한 잠깐의 멈춤을 실천할 수 있는가.
세상은 언제나 바쁘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 흐름을 단숨에 바꾸는 건 거대한 힘이 아니라, 아주 작고 조용한 기다림의 온도다.
그 온도는 문을 닫느냐, 열어두느냐의 문제로 시작되지만, 결국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숨결로 남는다.
버스는 다시 달린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따뜻한 바퀴 소리로.
기다림이 있는 풍경은, 단지 도착지가 아닌, 동행 자체를 아름답게 만든다.
―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