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들 ㅡ시인 허만길

김왕식


나의 경복고 은사 허만길 선생과 한국 학자 최현배 선생











가르침의 들



시인/문학박사 허만길





아직 가르침이 없을 때
사람은 길이 없는
황량한 들에
황량한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길 없는 들을
사슴이 뛰고
표범이 서로 으르렁거리듯
아직 가르침이 없을 때
사람도
그 한 무리로 거의 그렇게 있을 뿐이다.
민둥벌판에
언제 메마를지도 모를
야생과일을 달고 큰맛으로 가꾼다면
얼마나 값진 일이랴.
철없는 야생마를
어엿한 준마로 키운다면
얼마나 힘든 일이랴.
황량한 들에
가르침의 샘물 부지런히 일구면서
황량한 모습의 사람에게
가르침의 샘물 흠뻑 축여
사람으로서의 사람 기르는 이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랴.
힘든 일이지만 얼마나 복된 일이랴.
사람이 사람을 기르는 일은
내가 먼저
가르침의 샘물 넉넉히 지녀야 할 일이기에
내가 먼저
가르침의 넉넉한 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기르는 일은
배우는 이가 스스로 내게로
다가오고 싶어야 할 일이기에
내가 먼저
극진한 사랑의 들이 되어야 한다.
아직 가르침이 없을 때
사람은 길이 없는
황량한 들에
황량한 모습으로 있을 뿐인데,
가르침의 넉넉한 들, 극진한 사랑의 들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들, 스승들이 있기에
사람은 사람으로서
자꾸만 자라고
자꾸만 높아진다.
가르침의 넉넉한 들, 극진한 사랑의 들
세상에는 그러한 스승들이
참으로 있단다.
참으로 있어야 한단다.
그러한 스승들이
참으로 고맙단다.



출전: 월간 <문예사조> 2001년 9월호 (발행 문예사조사, 서울. 2001)









황량한 들에서 피어난 가르침의 들
— 허만길 시인의 「가르침의 들」




문학평론가 김왕식





허만길 시인의 「가르침의 들」은 단순한 교육의 찬미를 넘어, ‘사람이 사람을 길러낸다’는 존재론적 성찰이 깊게 배어 있는 시다. 이는 교육을 한 개인의 기능적 전달이 아닌, 존재의 본질을 일깨우는 창조의 행위로 인식하는 시인의 철학이자, 삶의 미학이 응축된 선언이라 하겠다. 이 시는 결국 허만길 선생 자신의 삶을 은유하는 한 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단벌 신사복에 꿰맨 소매로 검소한 교단의 상징이 된 이가, 황량한 들에 가르침의 샘을 부지런히 일군 ‘넉넉한 들’이었음을 시는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시는 "아직 가르침이 없을 때 / 사람은 길이 없는 / 황량한 들에"라는 절절한 구절로 시작한다. 이 ‘들’은 미개와 무지를 상징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완성된 존재가 아니며, 내면은 아직 길이 나지 않은 광야이다. 그 광야는 자연 그 자체로는 야생성과 폭력을 품고 있고, 사슴과 표범이 으르렁대듯 무질서하다. 허만길 시인은 이 무질서의 들판에 ‘가르침’이라는 물줄기를 흘려 보내며, 그것이 곧 문명이며 인격이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르침’은 단순한 전달이나 주입이 아니다. 그것은 “샘물”이 되어야 한다. 흘러야 하며, 스며들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갈증을 해갈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그 샘물을 “부지런히 일군다”라고 표현함으로써, 가르치는 일의 고된 노동성과 동시에 숭고한 소명을 함께 드러낸다. 한 그루 나무를 심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들’을 일구는 일임을 자각한 시인의 시선은, 사명감의 차원을 넘어 생태적 감응의 지점까지 도달한다. 가르침은 삶의 생태를 바꾸는 일이다.

그렇기에 허 시인은 말한다. "내가 먼저 / 가르침의 넉넉한 들이 되어야 한다." 이 구절은 가르침의 본질이 타자에게 향한 권위가 아닌, 자기 내면으로의 수양임을 강조한다. 시인은 교육의 본질을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사랑의 가능성으로 본다. 단지 ‘말해주는’ 자가 아닌, ‘다가오고 싶게 만드는’ 자, 스스로를 비워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품도록 만드는 이, 그가 곧 진정한 스승이다.

마지막 연들은 선언적이다. “그러한 스승들이 / 참으로 있단다. // 참으로 있어야 한단다.” 이 이중의 종결은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응시한다. 지금 여기에도 그런 스승이 있다는 위로, 그리고 앞으로도 반드시 그런 이들이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 허만길 시인의 이 시는, 시대가 교사를 점점 기능인으로 환원하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서, 교사의 존재론적 위상을 다시 환기시키는 선언문이기도 하다.

이 시는 형식의 간결함과 언어의 명료함 속에, 철학과 미학을 고르게 담아낸 탁월한 교육시이자 실존시다. 시인은 언어를 휘두르지 않고, 고요히 눕힌다. 언어를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워둔다. 그의 시는 기교보다 정직으로 빛나며, 바로 그 정직함이 오늘의 우리 교육이 잃어가고 있는 ‘진심’을 되돌아보게 한다.

허만길이라는 이름은, 이 시의 마지막 연과 절묘하게 겹쳐진다. 가르침의 넉넉한 들, 극진한 사랑의 들. 이 아름다운 은유는 단지 문학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런 ‘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들이 되기를 바란다. 참으로 고맙고, 참으로 깊은 울림의 시다.



ㅡ 청람 김왕식







경복고 재직 시 허안길 선생님




경복고 졸업 당시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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