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자연인 안최호
■
신앙의 다리를 놓는 마음
― 안최호가 성찰한 개신교와 가톨릭의 화해를 위하여
자연인 최호 안길근
나는 어린 시절, 성당 제단 옆에서 복사를 하며 사제의 길을 꿈꾸던 아이였다. 정결한 제의 위로 퍼지는 향, 촛불과 함께 어른거리는 기도의 숨결, 천장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올리던 눈빛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내게 신앙은 두려움보다 경외였고, 율법보다 사랑이었다. 가톨릭은 그렇게 내 영혼의 첫 성전이 되었고, 인간을 향한 하늘의 다정한 시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나는 낯선 현실을 마주했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나에게, 개신교 일부 교단의 시선은 차가웠다. “가톨릭은 이단이다”라는 단언은 단순한 주장이라기보다, 나의 신앙의 뿌리를 부정하고, 내 영혼이 들어선 첫 성전을 외면하라는 강요처럼 들렸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동시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따르는 이 두 신앙 공동체가 왜 서로를 이방처럼 대해야 하는가?
그 의문은 나를 개신교의 교리와 역사, 신학과 전통을 더 깊이 살펴보는 길로 이끌었다. 나는 단지 반박을 위한 탐구가 아닌, 더 넓고 깊은 이해의 마음으로 개신교를 바라보려 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결코 파괴나 분열이 아니라, 갱신과 회복에 있었다는 것을. 루터는 교회의 타락에 저항하며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외쳤고, 교황 중심의 제도와 권위에 맞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 정신은 정당했으나, 이후 양측에 드리운 오해와 감정의 벽은 너무도 두터웠다.
하지만 시대는 달라져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이 먼저 손을 내민 화해의 선언이었고, 루터교 세계연맹과 가톨릭이 함께 발표한 ‘칭의에 대한 공동 선언문’은 오랜 분열의 터널에 빛을 비춘 사건이었다. 한국에서도 사회 정의, 평화, 인권의 문제 앞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고 있다.
나는 이 여정을 통해 배웠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다르지만,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님을. 가톨릭 신자들은 깊이 기도했고, 성찬과 성인을 존중하며 경건한 일상을 살아냈다. 개신교인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내면의 믿음을 키워갔다. 두 신앙 전통은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 끝에서 만나는 진리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내 안에는 성당의 향과 개신교 예배당의 말씀이 함께 살아 있다. 나는 그 어느 한쪽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을 이해하고, 이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어떤 경계도 사랑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하늘은 하나이고,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도 다르지 않다.
오늘 나는 다짐한다. 나 안최호는 더 이상 신앙이 분열의 이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때, 그 중심에는 항상 사랑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믿음이란 다름을 끌어안는 용기에서 시작되고, 이해와 존중으로 피어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다리를 놓고 싶다. 내가 품은 신앙의 처음과 지금 사이에,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나처럼, 울타리가 아닌 다리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믿고자 하는 복음이며, 내가 평생 살아갈 신앙의 방향이다.
자연인 안최호
■
도량의 신앙, 시선의 품격
― 자연인 안최호가 보여준 종교에 대한 성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트럭 운전대를 잡고 세상을 일구는 이, 그 손에는 굳은살이 배어 있고, 그 눈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다. 자연인 안최호는 그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깨우는’ 사람이다. 그의 발밑엔 거친 아스팔트가 펼쳐져 있지만, 그의 정신은 늘 진실과 사랑, 정의와 화해라는 더 높은 경지에 닿아 있다. 이번에 그가 던진 통찰의 주제는 ‘종교’다. 그것도 너무나 오랜 세월 대립과 오해 속에 놓여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화해라는 무거운 주제다.
그는 결코 어느 한편의 입장에 갇히지 않는다. 가톨릭에서 배운 신앙의 첫 숨결을 부정하지 않으며, 개신교에서 얻은 말씀의 내면화 또한 귀히 여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묻는다. “왜 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서로를 배척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삶 속에서 오랫동안 신앙을 실천해 온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진심의 물음이다.
특기할 것은, 안최호의 시선이 언제나 ‘경계의 해체’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는 개신교의 ‘말씀 중심’과 가톨릭의 ‘경건한 전통’을 동시에 품으며, 신앙은 틀 속의 정의가 아니라, 삶 안의 사랑이어야 함을 증명해 보인다. 배척과 단절의 언어 대신, 그는 ‘다리를 놓는 신앙’을 말한다. 한 손엔 복음서를, 한 손엔 묵주를 든 채 그가 걷는 길은, 종교를 도구로 삼는 이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진심의 길이다.
세상의 대부분이 흑과 백으로 편 가르기를 즐길 때, 안최호는 늘 회색의 품격, 혹은 무지개의 다정함을 말해왔다. 삶을 운전하며, 그는 사람을 보고, 구조를 보고, 진리를 꿰뚫는다. 그에게 종교는 구별의 이름이 아닌, 이해의 출발점이며, 신앙은 배타의 논리가 아닌 포용의 언어다.
이처럼 ‘사람 냄새’와 ‘하늘의 뜻’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그의 시선은, 단순한 종교 평론을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와 삶에 대한 철학이자, 오늘날 갈등의 시대에 필요한 영성의 모델이다. 그가 보여준 균형감은 학자도, 성직자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통찰이며, 트럭의 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눈이 이토록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인 안최호. 그는 묻지 않았다. 다만 살아냈고, 그 삶 안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큰 질문을 남겼다. 그의 능력의 끝은 어디인가? 어쩌면, 끝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의 걸음이 멈추지 않는 한, 그는 늘 한 걸음 더, 우리보다 앞서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