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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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산고등학교 국어 교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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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비를 소재로 쓴
과제물로 제출했던
수필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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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얼굴, 마음의 풍경
― 계절 따라 달라지는 나의 비의 정서
수필가 청람 김왕식
비는 단지 하늘의 눈물이 아니다. 비는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감정의 전령이며, 사계절을 통과하며 나를 드러내고 감추는 또 하나의 나다. 나는 비가 올 때마다 내면의 창을 연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계절의 얼굴을 닮은 나의 심상이 앉아 있다.
봄비는 기억의 잉크처럼 스며든다.
봄의 첫 비는 어릴 적 흙내와 함께 돌아온다. 그것은 생명의 문턱을 적시는 어머니의 손길 같다. 아직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지만, 그 속엔 따스함이 배어 있다. 초록의 씨앗들이 움트는 비, 소리 없이 뿌리로 스며드는 그 물기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과거를 되짚는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흩날릴 때, 봄비는 그런 내 마음을 조용히 감싼다. 내 안의 미처 피지 못한 꽃잎 하나가, 그 비를 맞으며 천천히 펴진다. 봄비는 시작을 위한 눈물, 미래를 위한 추억의 물결이다.
여름비는 감정의 피아노다.
여름은 강렬하고, 비는 격정적이다. 구름이 몰려오면 마음이 먼저 눅눅해진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억눌린 감정들이 쏟아지고 번개처럼 오래 묻어둔 말들이 터져 나온다. 여름비는 나를 단숨에 진실하게 만든다. 그 아래선 가식도, 체면도 씻겨 내려간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쌓인 마음의 먼지가 한순간에 씻기고, 땀과 함께 섞여 무릎까지 차오른다. 그러나 또 금세 멈추고 맑아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안다. 여름비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움도, 분노도, 열정도 마침내 지나가고, 나를 정화시킨 후 물러간다. 여름비는 마음의 대청소이자, 감정의 급류다.
가을비는 침묵의 편지다.
가을의 비는 말이 없다. 조용히 내리고, 무겁지 않게 스민다. 그러나 그 속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떠난 이들, 흩어진 말들, 수확되지 못한 꿈들. 빗줄기를 바라보며 창가에 앉으면, 문득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것은 쓸쓸함이 아니라, 고요한 성찰의 시간이다. 가을비는 내 안의 낙엽을 하나씩 떨군다. 필요 없는 허세와 과장, 조급한 열망들이 떨어지고, 남은 것은 오직 단단한 나 자신이다. 그 빗소리는 마치 삶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조금 천천히 걸어도 좋다”라고, “멈춰서도 괜찮다”라고. 그래서 가을비는 인생의 사색을 돕는 음률이다. 낡은 마음을 덮고, 새로운 통찰을 틔우는 지혜의 비다.
겨울비는 생의 끝자락에 선 자의 고백이다.
겨울비는 어쩐지 낯설다. 차가운 뼈를 타고 스며들고, 어깨를 더 웅크리게 한다. 눈으로 내려야 할 것이 물로 내릴 때, 계절조차도 슬픔을 숨기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 날은 마음이 더 얼어붙고, 더 깊은 곳에서 나를 마주한다. 창밖에 떨어지는 그 음울한 물소리는 무언가 말하지 못한 채 가라앉는 이의 침묵 같다. 겨울비는 죽음에 가장 가까운 감정, 혹은 새로운 탄생 직전의 정적이다. 나는 그 비를 맞으며 삶의 무게를 헤아리고, 남은 하루를 더 조심스럽게 포개본다. 겨울비는 마치 인생의 쉼표 같다. 긴 노정을 걸은 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숨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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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하늘에서 왔지만, 언제나 내 마음에 먼저 닿는다. 계절 따라 내리는 그 빗물의 표정은 곧 내 마음의 표정이다. 봄비가 기억을 깨우고, 여름비가 감정을 터뜨리며, 가을비가 생각을 깊게 하고, 겨울비가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세상이 아닌, 내 안을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 있는 나를 만난다. 비는 늘 내게 묻는다. 지금 너는 어떤 계절의 마음으로 서 있는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리고 조용히 웃는다.
오늘의 비는 나를 다시, 나로 이끄는 길이다.
ㅡ 청람 김왕식
60대 중후반의 나